한국 액션의 변화
지창욱 주연의 <조작된 도시>
관람한지는 좀 되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일단 지창욱이라는 배우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잘 생긴 외모도 그렇거니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창욱을 제대로 접한건 드라마<기황후>에서였는데요, 기황후의 남편인 원나라 황제 타환을 연기했었죠.
<기황후>에서 가장 빛난 주연은 단연 하지원이였겠지만 제 뇌리에는 '지창욱'이라는 세 글자가 똑똑히 남겨졌습니다. 기황후의 캐릭터보다 타환의 캐릭터가 연기하기에 훨씬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훌륭하게 소화해 냈기 때문입니다. 타환이라는 캐릭터는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해 드라마 한 회에서만도 희노애락이 모두 드러나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창욱의 타환은 그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넘나들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지창욱을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TV도 아닌 영화 주연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조작된 도시>의 포스터만 봐도 아시겠지만, 티켓파워가 강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은 아니란 점과
쟁쟁한 경쟁영화들 때문에 얼마나 흥행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관객들에게 대체적으로 후한 점수를 받으며 <조작된 도시>만의 고유한 정체성은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개봉한지 한참 지난 영화이기 때문에 스포가 조금 포함될 수도 있음을 알려드리고, 딱히 반전이 있거나 알면 큰일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조작된 도시>의 배경은 현재 대한민국 서울이지만 완전히 현실적인 것은 아닙니다. 민천상(오정세)의 비밀방이라든지, 여울(심은경)의 아지트는 조금 더 먼 미래를 담고 있죠. 민천상이 바닥전체를 덮은 디스플레이를 발로 툭툭 밀치며 조작하는 모습이나 여울이 작전회의 때 사용하는 테이블모니터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톰 크루즈의 그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한 권유가 수감된 교도소는 미드나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나올만한 살벌함을 자랑하고 있죠. 현실에서 찾기 힘든 외양과 구조를 갖춘 그런 비현실적인 교도소입니다.
현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작된 현실이라는 것, 현실과 조작 사이 거기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체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런 미쟝센이겠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도 쉽고 꾸준히 일어나 왔으니까요.
'조작'이라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은 정보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많이 알아야 '조작'이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정보수집'에 큰 비중을 두고 있고, 그런 정보수집을 위해 현실에선 아직 상용화 되지 않는 IT기술들을 녹여본 것 아닐까요?
<조작된 도시>의 장르는 액션입니다. 액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스피드'입니다. 액션영화의 호흡이 느리면 그만큼 몰입도가 떨어지겠죠? 그동안 수많은 국산액션영화들이 가졌던 문제점 중 하나는 액션 이외의 조미료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코믹, 로맨스, 드라마 등을 자꾸 넣다보니 정작 액션영화로서의 속도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죠. 관객들이 '본 시리즈', '미션임파서블', '007시리즈' 등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액션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스토리의 다른 요소들이 액션영화의 본질을 흐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작된 도시>는 제법 훌륭한 액션영화입니다. 지창욱(권유)와 심은경(여울)을 충분히 러브스토리로 엮어버릴 수 있는 유혹이 많았을텐데도 불구하고, 결국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됐습니다. (권유는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이 아니니까요)
촉망받던 전직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권유의 액션도 좋고, 도심을 가로지르는 개조마티즈의 차량추격씬도 좋습니다. 추격과 액션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전개도 빠르고 지루할 틈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조작'이기 때문에 한 번 흐름을 놓치면 다시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창욱 말고도 오정세라는 배우도 좋아합니다. 오정세가 나오는 영화마다 오정세는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배우입니다. 적어도 오정세때문에 영화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잘 안나오죠.
소화하는 캐릭터의 폭이 어마어마한 배우인데, 이번에는 미치광이 변호사로서 악역을 맡았죠. 남들보다 우월한 것을 과시하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전형적인 싸이코. 겉으로는 온순하고 순진하고 예의바른 척 하지만 속은 잔혹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딱 그런 악역.
차분한 눈빛과 말투, 쭈구리한 모습과 자세의 민천상 변호사를 오정세는 완벽하게 연기하고, 또 하나의 자신의 대표 캐릭터를 만들어 냈습니다. 권유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쏟아대는 그의 독백연기는 오정세가 캐릭터 연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느끼게 해주더군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민천상의 'Why?'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인데요, 대부분의 싸이코악역들에겐 그렇게 변해버린 혹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납득할 수 있을만큼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스토리 전개에 무리가 없고, 그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한 당위성에도 힘이 실립니다. 싸이코는 선천적 요인만큼이나 환경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싸이코 범죄자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투영하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주인공인 권유는 게임에서 만났던 친구들(물론 나이는 다르지만)과 함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영화의 오프닝 역시 게임을 실사화 한 전투씬입니다. 이 영화가 게임을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은 '조작된 현실', 다시 말해 가상의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게임이라는 콘텐츠 임과 동시에 게임이라는 형식을 빌려 현실의 부조리함을 보여주고 싶어서겠죠.
어찌보면 게임은 정말 솔직한 콘텐츠입니다. 투자한 시간과 돈만큼 레벨과 실력이 오르는 아주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거부하는 핵, 어뷰징을 하는 유저들도 있지만...)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게임 속 세상 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느낄 때도 많지 않나요?
영화 안에서 게임과 현실은 극명하게 대립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게임의 방식을 이용하구요.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 생존을 위한 전략, 그것을 가능케 하는 협동은 사실 모두 현실에서도 필요한 것들이죠.
민천상보다 먼저 권유와 대립하는 악역으로 마덕수(김상호)가 있습니다. 교도소 수감자 중 1인자로 군림하는 마덕수는 조폭의 수장입니다.강간살인이라는 죄목으로 들어왔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권유를 아니꼽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굴복시킬 생각으로 가득차 있죠.
마덕수라는 존재는 영화의 전개에 있어서도 긴장감을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만, 문제는 마덕수가 너무 개그적인 캐릭터라는 것이죠. 지금의 절반만 웃음을 빼고 무게감을 살렸더라면 더 쫄깃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마덕수가 권유의 친구들을 매달아놓고 죽이기 위해 총을 쏘는 장면에서 마덕수의 연기는 진짜 너무 뜬금없는 개그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액션영화로서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네요.
(5개: 재미+작품성=어머, 이건 꼭 봐야해!)
(4개: 작품성or재미=딱히 싫어하는 취향이 아니라면 보면 좋을 영화)
(3개: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킬링타임용)
(2개: 취향을 심하게 타거나 굳이 안 봐도 될...)
(1개: 왜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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