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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Apr 26. 2024

범부는 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민희진 대표 기자 회견에 부쳐


하이브 산하 레이블의 경영권 탈취 기도 혐의를 받고 있는 민희진 씨의 긴급 기자 회견이 있었다. 처음엔 준비한 대본도 없이 나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어서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기자 회견이 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민희진 씨는 싸움을 이기러 나온 게 아니라, 정말 허심탄회하게 본인 생각을 이야기하러 나온 것이었고, 이것 저것 계산적으로 재지 않고 시총 수 조 규모 기업 임원진들 상대로 '빠꾸없이' 들이받는 그 모습에 나를 포함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나는 단지 그 분의 그릇과 도량이 얼마나 큰지 미리 깨닫지 못했던 한낱 범부였을 따름이다.


이 정도로 표현 수위가 거세고 정제되지 않은 기자 회견은 아마 세계적으로 따져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유명 아이돌 그룹의 메인 디렉터, 프로듀서라는 민희진의 지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민희진 씨는 그야말로 할 말, 못할 말 다 했다. 방시혁과의 개인 톡 분량을 상당한 분량으로 공개했고, 다른 임원진들의 봉급도 까발렸으며, 다른 그룹, 기획사의 이름도 거침없이 거론해가면서 하이브와 본인 사이의 오랜 갈등의 역사를 설명했다. 이번에 서술된 '전지적 민희진 시점'에서 보면, 뉴진스의 데뷔와 홍보를 두고 수 차례 본사 차원에서의 견제가 있었고 약속된 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게 모든 갈등의 시초였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씨X, X밥, 지X, 병X 등 도저히 생방송 수위로 생각할 수 없는 욕설들이 수없이 분을 못이겨 터져나왔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필리버스터였지만, 그럼에도 민희진 대표의 메세지는 분명했다. 경영권 탈취는 하이브가 압도적인 대주주 지위를 점하고 있는 지분 구조상 불가능할 뿐더러, 실제로 착수된 적이 없다는 것. 만약 그런 시도가 이루어진 증거가 있으면 더럽게 뒤에서 언플로 뒷공작 하지 말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서 '맞다이'를 뜨자는 것이다. 그러자 기자 회견 직전까지도 민희진이 '무속 경영'을 했다는 낭설을 유포해가면서 박차를 가하던 하이브의 언플이 돌연 중단 되었다. 일일이 대응할 가치도 없는 거짓말뿐인 회견이었다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그간 민희진 대표의 개인 메신저 기록을 공개해가며 '자연인 민희진'을 망신주기에 열올리던 하이브 측의 행적을 생각하면, 앞뒤가 안맞는 해명이다. 막말로 지금 민희진을 더 자극했다간 정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닥칠 수밖에 없던 것 아닌가?


민희진은 이럴 필요가 없었다. 공식 석상에 얼굴 내밀 필요없이 서면으로만 대응할 수도 있었고, 남들처럼 정장 차려입고 나와서 변호사가 써준 대본만 읽어도 됐다. 그게 본인의 대외적 위신을 지키는 길임은 물론, 향후 이어질 법적 공방을 고려했을때, 가장 안전한 길임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럼에도 민희진은 법정 대리인들이 극구 권유했을 안전하고 실리적인 경로를 택하지 않았다. 이 날 민희진 씨는 어도어 대표 민희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인 민희진으로서, 그야말로 다 내려놓고 칼춤을 췄다. 그렇다고 무슨 치밀한 계산 하에 의도적으로 리스크 테이킹을 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타고난 예술가로서 정형화된, 관습화된 방식이 천성에 안맞는 사람인 것이다. 뉴진스 멤버들을 한 명씩 언급하는 장면을 보면, 그 전까지는 독기 서린 톤으로 '막말'을 늘어놓던 사람이, 뉴진스를 언급할때만 어투가 순해지면서 뜬금없이 멤버들 칭찬을 늘어놓는데, 그걸 보면 이 사람이 단순히 프로듀서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뉴진스에 대해 정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솔직히 기자 회견 초반부까지는 이제 뉴진스 멤버들을 위해서라도 민 대표가 떠나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뉴진스는 단지 프로듀서 민희진이 만든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인 민희진이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부모 자식 사이의 인연은 천륜과도 같은건데, 어찌 천륜을 갈라놓을 수 있겠는가?


(사람에 따라선 멤버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또한, 민희진 대표가 이해타산을 따져서 전략적으로 실행한 일은 아니라 본다. 그냥 깊은 애정에 의해서 문득 말이 터져나왔을 뿐이지.)


민희진은 스스로의 안위를 조금도 보살피지 않는 자멸의 수를 던지면서, 벼랑 끝 전술을 시전하면서, 대중 선전의 대가, 국내 최대 미디어 공룡을 상대로 여론의 균형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에 성공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리고 향후 펼쳐질 결과의 향방을 떠나서 민희진이라는 인간의 그릇 크기, 도량이라는 것이 우리같은 범부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입증했다. 온 나라의 기자들이 자기 하나 죽이려고, 쓰레기 만들려고 회사가 써주는 보도 자료 받아다가 기사를 써갈기는데, 저렇게 버티고 나서서 '들이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저만큼의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협객은 그 행하는 바가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하다. 이미 약속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며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은채 남의 위급함을 돕고, 사생존망의 위급함을 겪었어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 『사기』 유협열전



솔직히 민희진이 그간 벌였던 행적들이 모두 옳다거나 성숙한 사회인으로서의 태도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개 프로듀서가 아니라, 한 레이블의 수장으로서 본인의 입장과 말의 무게를 신중히 생각하고 처신했어야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어도어를 하이브에서 독립 시키겠다는 얘기가 비록 푸념에 가까운 것이었다고는 해도, 법리적인 문제는 없다 해도, 회사의 입장에서는 민희진 대표의 지위를 고려했을때, 그 말의 의미를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가 시키는대로 활동했을 뿐인 다른 그룹 멤버들을 거론하면서 이 더러운 정치 싸움에 끌어들인 것도 까놓고 말해, 애들 상대로 어른으로서 잘한 짓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날 민희진의 '살풀이', '퍼포먼스'는 그런 정식화된 옳고 그름의 구분을 넘어선 무언가의 가치를 절절하게 온몸으로 불살라서 표현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 시절 사상 범죄자였던 자기 장인을 두고 펼쳐진 색깔론 공세에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라고 역설하며, 인간 노무현의 조강지처에 대한 '의리'를 앞세우면서 판도를 뒤집었듯이, 이 날 인간 민희진이 보여준 '에토스'의 민낯은 그 어떤 논리나 법리보다도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다.


이번 공연을 통해 민희진이 새로운 국힙 원탑 자리에 등극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냥 힙합 GOAT로 못박아놔도 된다. 내가 아는 한 해외 힙합 아티스트들 중에서도 이 정도의 도량을 가진 자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민희진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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