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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Sep 02. 2019

종교성과 근대성에 관한 탈근대적 성찰

영화 <47미터2>


<47미터2>는 오락영화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 배급사 표현에 의하면 ‘익스트림 서바이벌 스릴러’다. 이런 설명이 붙은 유형의 영화를 ‘킬링타임 영화’라고도 한다. 시간을 죽이는 영화는 지루하면 안 된다. 빠른 전개, 질질 끌지 않은 단호한 사건처리, 그리고 반전을 품은 따뜻한 결말까지, <47미터2>는 내 취향으로는 재미있다. 특히 요하네스 로버츠 감독은 ‘익스트림 서바이벌 스릴러’의 생존자를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결정한다. 납득할 만한 사람이 설득력 있게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영화가 시작하자 곧 펼쳐진 상황에서 최후의 생존자를 예상해 봤고, 최후의 생존자 외의 등장인물이 죽어가며 수행할 역할도 상상해 봤는데 대체로 적중했다. 그렇다고 식상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이 예상한 결말을 식상하지 않게 끌어내는 게 이런 유형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핵심 역량이다. 즉 납득할 만한 사람이 설득력 있게 살아남거나 죽어야 한다. 비슷한 틀을 유지하지만 마지막에 ‘서바이벌’ 자체의 반전을 배치한 전편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그렇다면 <47미터2>에서 전편에 비해 (‘서바이벌’ 자체보다는) ‘익스트림’과 ‘스릴러’를 강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직하다. 전편보다 공간의 범위가 넓어지고 등장인물이 더 늘어나서 스릴러의 동학이 강해진 건 불가피했다.




수직적 스릴러를 수평적 스릴러로


전편 <47미터>는 연출하기 힘든 영화다. 등장인물이 사실상 두 명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이 상어관찰을 위해 들어간 케이지가 47미터 깊이의 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탈출하기까지를 그렸다. 산소통으로 호흡해야 하기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수직적 ‘익스트림 서바이벌’을 모색한 전편과 비교해 <47미터2>는 수평적 ‘익스트림 서바이벌’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케이지 대신 세노테(Cenote)가 등장한다. 해저로 추락한 음산한 케이지에 비해 세노테는 휘황하다. 영화 초반에 일종의 입구로 제시된 세노테는 물속에 잠긴 마야문명 유적지 등 다른 볼거리(혹은 무대)로 곧바로 대체된다. 세노테는 멕시코 유카탄반도 등 중미 마야문명 지역의 정글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천연샘으로, 석회암 암반 표층이 함몰돼 지하수가 드러나며 생성됐다. 영화에서 드러나듯 열대우림 속에 신비롭게 자리한 세노테는 절경을 자랑한다. 


한국에서 개봉하며 붙인 영화 제목과 원제는 조금 다른데, 한국 수입배급사의 작명 <47미터2>는 ‘2’가 속편이란 뜻이기에 하는 수 없이 전편 <47미터>를 <47미터1>로 만든다. 전편과 속편을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나의 견해로는 1에 이은 2는 대체로 납득할 만하지만 ‘47미터’ 자체는 <47미터2>에서는 사라져야 한다. 


1편에서 설정된 ‘47미터’ 해저는, 아마도 영화 제작진에게서는 부여되지 않았겠지만 영화 후경에서 누출되는 의미를 포착하면 절대고독이다. 관객은 47미터 해저의 케이지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조난자를 마찬가지로 홀로 대면하게 된다. 산소통의 산소가 고갈돼가지만 다리가 철 구조물인 케이지에 깔려 있어 옴짝달싹 못 한다. 설령 산소가 떨어지기 전에 다리를 빼내어 케이지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밖에는 상어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 


게다가 케이지에서 나와서 전속력으로 부상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잠수병을 피하려면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바다 속에서 수면 위로 서서히 부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스릴러의 문법 속에서 47미터 해저의 고립과 고독에 압도된다. 상어는 부차적인 위협이다. 포유류인 인간이 해저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린다. 스릴러 너머에서 추출된 절대고독의 압력은 영화 후경에 깔리어 현상의 스릴러를 증폭시킨다.


2편에서는 이 ‘47미터’가 사라진다. 대신 더 전형적인 스릴러 영화가 자리 잡는다. 깊이를 넓이로 바꾸자, 절대고독이 사라지고 단호한 긍정의 경쾌한 액션이 나타난다. 이제 상어는 본질적 위협이 된다. (‘케이지’와의 대결이 아니라) 상어와의 대결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그려내느냐가 영화의 성패를 가늠한다.


<47미터2>의 원제는 <47 meters down: uncaged>다. <47미터(47 meters down)>에서 케이지(Cage)를 없앤(Un) 제목이다. 1편에서 케이지는 공포와 고립의 공간이자, 상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이중성은 케이지 자체에서 드러난다. 케이지는 ‘샤크 케이지’를 말하는데, 새장(Birdcage) 등 일반적인 케이지와 달리, 케이지 안에 상어가 아닌 사람이 들어간다. 배와 연결돼 있을 때의 ‘샤크 케이지’는 사람이 들어간 케이지로서 물속에서 상어를 볼 수 있는 장치지만, 영화에서처럼 배와 연결이 끊어지면 상어가 지켜보는 인간이 갇힌 케이지로 변한다. 둘 중 어떤 상황이든 케이지 안에 상어는 없고 항상 인간이 들어있다. ‘보는’ 주객이 바뀔 뿐이다. 


47미터 아래위로 일어나는 이런 주객전도는 판옵티콘에서의 감시의 역전과 닮아 있다. 역전의 역설은 2편의 전제가 된다. ‘Uncaged’는 ‘샤크 케이지’에 든 인간이 케이지 밖에 있음을 뜻하기에 이제 인간은 (마르크스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 이중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즉 고립과 감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서 동시에 보호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 ‘Uncaged’한 2편에서 인간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서든 상어를 만날 수 있다. 


정작 ‘샤크 케이지’에서 정말로 자유로워진(Uncaged) 존재는 케이지 안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상어다. <47미터2(47 meters down: uncaged)>는 ‘샤크 케이지’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상어를 케이지로부터 어떻게 꺼내느냐로 요약된다. 역설은 앞서 살펴본 제목에 들어 있다. <47미터2>는 <47미터> 없이는 존립하지 않지만, <47미터2>가 ‘47미터’를 지워버리고 말았기에 속편은 <2>라는 전혀 새로운 영화가 돼야 한다.





깊이를 대체한 다양한 결


2017년 개봉된 <47미터>는 파격적인 엔딩과 기발한 전개로 북미에서 제작비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이는 등 흥행에 성공했기에 <47미터2>는 시간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관건은 제목에 들어있지 않은 케이지란 모티브를 속편에서 어떻게 소화하느냐로 모아진다. 그리하여 전편의 케이지(Cage)는 속편에서는 동굴(Cave)로 바뀐다. 제작진은 “훨씬 더 스케일을 키운 속편으로 관객들에게 더 멋진 경험을 주고 싶었다. <47미터2>는 전혀 다른 차원의 케이브 다이빙을 다루고 있는데 아무도 본 적 없는 소재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케이지’가 ‘케이브’로 바뀌면 많은 것이 변한다. 일단 47미터 해저의 케이지라는 확정성이 빚어낸 거대한 불안과 공포는 동굴이 상징하는 불확정성과 위험으로 바뀐다. 전편이 광장공포와 유사하다면 속편은 폐소공포와 닮았다. ‘케이지’의 주인공은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불안과 곤경에 처하지만, 결국 구조된다. 이런 확연한 불안과 곤경, 그리고 위로부터의 구원의 구조는 관점에 따라 (제작진이) 뜻하지 않은 종교적 메타포로 읽힌다. 과감하게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고딕식 염원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염원은 순도 100%의 고딕식일 수는 없고 판옵티콘과 같은 근대의 불순물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대체로 전편(前篇)이 후경에 중세적 아우라를 짙게 드리운다면, 속편은 근대성을 전편(全篇)에서 품어낸다고 말할 수 있지 싶다.




킬링타임 이상의 영화


<47미터2>에서 등장인물은 스스로 케이브의 경로를 선택한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그 책임은 죽음이다. 전편과 달리 속편에서 등장인물은 공간의 구조와 위협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터널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질 미로(迷路) 속의 다음 터널을 받아들이면서, 그 선택지 안에서 결정하고 대응하며 최선의 경로를 찾아낼 뿐이다. 


위기에 처하고 구원받는 게 모두 타인에게 속한 전편과 달리, 속편에서 4명의 소녀는 스스로 동굴 속으로 뛰어들고 4명 외의 인물까지 포함해 다수가 희생되면서도 주체적으로 출구를 찾아간다. 무모한 주체를 스릴러와 액션영화의 문법 속에서 소화하는 가운데 전편과 대비돼, 근대성은 뚜렷하게 부각된다. 속편의 근대성은 전편과 비교돼 돌출하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이 근대성은 탈근대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상은 상어의 탐욕스런 이빨이 노릴 만한, 수영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의 싱그러운 몸매만을 보여준다. 숨어 있는 근대성 혹은 탈근대성을 처녀의 몸매로 뭉뚱그려 내보이는 이 눙치는 수법이야말로 탈근대적이며 이런 유형의 영화의 속성이기도 하다. 종교적 세계관이 전편에서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속편에서는 종교적 세트와 활용이 돋보인다. 


<47미터2>의 배경은 물에 잠겨 수중도시가 된 고대 마야문명의 유적지 ‘시발바’다. 고대문명에선 인신공희가 흔했다. 제물로 희생된 인간의 뼈가 즐비한 수중제단에 케이브 다이빙을 통해 도달한 4명의 처녀는 영락없이 희생제물로 치환된다. 수중동굴에서 상어는 제물을 삼키는 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제물은 원래 무고해야 하기에 고대 마야문명의 수중 유적지 시발바에서 처녀들은 매우 적합한 상어의 먹잇감이다.


그리하여 어떤 처녀들은 희생되고 어떤 처녀들은 생환한다. 어쩌면 모두가 생환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이기심과 아둔함은 어렵사리 도달한 출구를 스스로 봉쇄한다. 마지막 장면은 액션활극이다. 전편과 같은 대대적 반전 대신, 액션문법을 따르면서 소소한 반전을 품은 따뜻한 결말을 유도한다. 최선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해피엔딩이다. 


<47미터2>는 그 자체로 재미있게 볼만한 오락영화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은 인문학적 성찰과 너머를 향한 해석은 전편과 연관 지어야 더 분명해진다. 오락영화로 봐도 좋고, 오락영화이면서 다양한 해석의 결을 가진 인문 텍스트로 봐도 좋다. 특별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는 않지만, 라디칼 페미니스트들은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싶다. 하긴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기나 한가. 8월 28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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