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집단적 관음증, 그리고 이카루스 식 꿈꾸기의 여전한 아름다움
꿈을 꾼다는 것은 정녕 좋은 일일까. 아니면 좋은 꿈을 꾸는 게 좋은 일일까. 혹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란 반론이 가능할까.
국내 한 케이블TV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슈퍼스타K>는 꿈꾸는 젊은이들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다. 그 꿈은 가수의 꿈이다. 그 꿈은 약 150만 명의 지원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최고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우승자에겐 적잖은 상금과 가수로서 입신 가능성이 제공된다. 10대 후반~20대 초반인 이들의 눈물과 땀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케이블TV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 정도의 사람마저 생방송을 지켜봤으니 그도 그럴 법하다.
인기의 원인이 무엇일까. 저인망식 설계에다 <인간극장>과 <사랑의 리퀘스트>를 상업적으로 적당하게 버무려 여러 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쇼 비즈니스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적절히 차용해 쌍방향 소통구조를 취한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제작자의 마음이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었다는 점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상업주의 또는 시쳇말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숭상한다고 프로그램 곳곳에서 솔직하게 표현한 담대함 혹은 뻔뻔함 말이다.
그런 성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속으로는 인정하더라도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법인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거침없이 까발린다. 한 회분 프로그램의 말미, 최종 탈락자를 발표하기에 앞서 지나칠 정도로 뜸을 들이다가 당당하게 “광고 보고 알아보자”고 말해도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꿈과 상업주의의 결합이 너무 공고한 까닭이겠다. 이 방송국이 그동안 쌓아온 ‘공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성취’인 셈일까. 상업주의가 프로그램에 너무도 잘 융합돼 좋은 꽃등심의 마블링을 보는 것처럼 일견 훌륭하다는 착각까지 일으킬 정도다.
세상은 결코 나눠가질 수 없으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검투의 구조
어쩌면, 인기의 가장 큰 원인이 ‘검투사 구조’는 아닐까. 한 명의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은 차례로 막강한 적들을 물리치며 세상의 정점에 선다.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구조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제로-섬’이라는 점이다. 세상은 결코 나눠가질 수 없으며,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잔류하는 데 성공한 자와 탈락자의 두 부류로 두부 모 자르듯 정확하게 나누는 프로그램의 결론은 화려한 화면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완벽한 흑백논리를 구현한다.
검투의 매력은 흑백논리이며 동시에 투사(投射)이다. 실제 나는 세상에서 영웅들(내 주변에 영웅들이 왜 이리 많은지!)의 한 칼에 나가떨어지는 추풍낙엽에 불과하지만 시청하는 프로그램 속의 누군가는, 나아가 내가 응원하고 격려하는 누군가는 영웅이다. 투사를 용이하게 하는 장치는 그 영웅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하등 다를 게 없었던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고대의 로마인들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열광하는 검투는 카메라의 앵글을 한쪽에만 고정해 한 면을 부각하고, 다른 한 면을 묵살한다는 점에서도 흑백구조를 취한다. 검투는 본질적으로 항상 가해자 우위의 틀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칼을 휘두르는 사람만 조명되고 칼 맞는 사람들은 비춰지지 않는다. 칼 맞는 사람들은 칼에 찔리는 순간 인격을 상실한다.
대리만족의 열광은 내가 겪는 세상의 신산(辛酸)이 클수록 비례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대리만족이 가능해진다. 이라크전에서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컴퓨터 화면을 보며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눌렀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의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통을 고통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치환해야 순수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대리만족에서 얻은 기쁨은 정신적 왜곡에 의한 가해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를 압도했다는 승리, 그 행위 또는 그 의식(儀式)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가책 없는 승리를 위해서는 희생자의 고통은 때로 희화화해야 하며, 나아가 희생자를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 더불어 고통마저 무기적인 것으로 격하하여야만 한다.
<슈퍼스타K>에서는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충이 일어난다. 이 프로그램이 <인간극장>적 요소들마저 고통의 무기화 또는 희화화와 결합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다. ‘고통의 인간적인 무기화(無機化)’란 이라크 상공 비행기 안에서 미군 조종사가 느낀 감정과는 다르다. 타인의 생생한 고통을 속옷 벗듯 확 드러내 사방에 공개하고 소금 뿌려서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은 ‘인간적인’ 고통 자체를 상품화해 하나의 소통의 재화로 활발하게 유통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승리뿐만 아니라 고통의 상품화까지도 프로그램 전략으로 취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상적이지 않은 취향’을 정상적으로 편제하는 행위는 상업적 성공을 보장할지언정 분명 병적인 것이다. 현대에, 또는 현대인에게는 고쳐지지 않고 스스로 고칠 의사(意思)도 없는 병이기에 불치병이다. 확실한 사실은 고칠 수 없다고 해서 병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병은 인간에게 죄악이다.
승리뿐만 아니라 고통의 상품화까지도 모색한 병적인 전략
이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속에서 젊은이들이 꿈을 향해 매진하는 모습은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거북한 검투의 구조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혼을 가득 채운 절실함은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루스처럼 희망의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상황에서 희망에 절박하게 또 간절하게 몸을 던지는 행위는 미학적으로 표현하면 숭고함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진지한 몸짓을 목격하며 때로 울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숭고하면 숭고할수록 애초에 장치로서 내재된 숭고함의 치명적 훼손에 대한 역겨움 때문이다. 꿈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다수는 일단 꿈꾸는 행위에 박수를 치고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슈퍼스타K>에는 이렇게 꾸어진 아름다운 꿈을 빨아먹는 유기적인 연결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제작진은 이들이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마당을 연 것이 아니라, 이들의 꿈을 더 많이 빨아먹을 수 있도록 검투장을 연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꿈장사까지는 용인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타인의 꿈을 악착같이 빨아먹는 행위를 절제할 수는 없었을까. 하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법이 아니다.
꿈을 꾸는 입장에서는, 만일 가능하다면 꿈꾸는 것 말고도 다른 꿈이 있어야 한다. 절박함과 간절함은 때로 미덕이고 소중한 꿈의 자질이지만, 그러나 일상적인 절박함과 간절함은 더 이상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피폐해진 삶의 편린일 뿐이다. 우리는 꿈꾸기를 그쳐서는 안 되지만 분명 꿈꾸는 것 말고도 다른 꿈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비가 되었든, 나비가 내가 되었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슈퍼스타K>의 출연자들이 정말 노래를 잘 부른다는 점이다. ‘슈퍼스타’ 장재인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이 가수 이문세뿐이었을까. 순환논법인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꿈꾸는 걸 아름답고 하는 것일까.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