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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vs. 디지털 노마드

by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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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왕 아틸라(재위 434~453년)는 유럽인의 오랜 기억 속에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야만족의 수괴이다. 훈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근거지로 성장한 세계사의 대표적 유목민족. 4세기초 유럽으로 이동, 서(西)고트족을 압박해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케 했다. 당시 동서양을 대표하는 문명국가인 중국의 한·수·당과 로마제국을 위협했다.


세계사는 정주민족과 유목민족 간 투쟁사로도 볼 수 있다. 최종 승자는 늘 농경을 주업으로 한 정주민족이었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용맹한 훈족은 역사에서 흔적없이 소멸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새로운 유목민족이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몽골 기마병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국경을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부유한 사람은 즐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며 유목민처럼 생활하고 있다. 1만년의 정착시대를 끝내고 새 유목시대를 열고 있는 종족이 바로 21세기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다.


‘디지털 노마드’가 보통명사처럼 쓰인 지 오래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정보기술(IT) 장비를 갖추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라고 예측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한술 더 떠 “우리는 다시 유목민이 됐다”고 선언했다. ‘디지털’과 ‘유목’은 피할 수 없는 새 인류의 운명이란 지적이다.


예측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이주기구 ‘2003 세계 이민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기준 전세계 이민자는 1억7천5백만명이다. 지난 35년 동안 이민자가 배로 증가했다.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하는 ‘세계화’는 ‘신유목시대’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룬다. 유목민이 성을 쌓지 않듯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 시대의 돈과 노동력은 철저하게 유목화한다. 고대


유목민이 더 좋은 풀을 찾아 양떼를 몰고 끊임없이 이동했듯 자본은 더 높은 수익률, 노동력은 더 나은 삶을 모색하며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디지털 노마드’가 몰려든 거대한 오아시스다. 출신 국가나 민족에 관계없이 자본주의와 디지털에 투철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꿈과 세계를 일궈나가고 있다. 인도와 중국은 이곳에 가장 많은 사람을 보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선 집적회로를 뜻하는 IC를 인도와 중국의 첫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현대의 유목은 물리적인 현실공간에서 사이버공간으로 확대된다. 레비는 “현대인에게 움직인다는 것의 의미는 더 이상 지구 표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즉 의미의 지형을 가로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 시대의 두 축은 사이버세계와 유목으로 귀결한다. 과거 유목민이 오아시스란 허브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었듯, ‘디지털 노마드’는 인터넷에서 생존의 조건을 확보한다. 정보화 시대의 쌀인 IC는 그래서 인터넷과 셀룰러폰, 즉 사이버세계와 모바일을 뜻하는 약자로도 해석된다.


유목민은 성을 쌓지 않을 뿐더러 성을 떠난다.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이 출생한 곳이 낡은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국어를 잊고 이방에서 외국어를 쓰며 생활한다.


‘신유목시대’를 주창하는 이들은 머지않아 국가주의가 퇴조할 것으로 점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가 21세기 안에 뿌리내릴 것 같지는 않다. 탈냉전 이후 지구촌의 혼란 상황이 시사하듯 ‘신유목시대’에는 세계화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갈등과 불확실성이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인류가 민족주의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유엔 회원국이 1,000개국을 넘어서 민족·인종·종교 간 갈등과 반목이 첨예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게다가 지구촌은 20억명의 인구가 하루 2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고 있고 전화(戰火)가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구촌은 남·북 격차에 ‘디지털 격차’까지 겹쳐 빈익빈 부익부 구조가 더욱 심해지고 고착될 수도 있다. 남쪽 세계에 속한 인구는 ‘디지털 노마드’로 변신을 꾀하기는커녕 굶지 않기 위해 흙먼지길을 전전해야 하는 영구적인 유랑인으로 남게 될 지 모른다.


유랑의 삶은 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계시민이 아닌 단순 무국적자의 혼란을 이미 한국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러기아빠를 흔하게 구경할 수 있으며, 가족 구성원이 2개국 이상에 흩어져 사는 ‘다국적 가족’이 드물지 않다. 교육시장의 저생산성 때문에 일어나는 ‘교육 노마드’ 현상은 전통적인 가족·학교공동체 관념을 흔들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는 태생적인 진보성을 갖는다. 지켜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한국의 ‘인터넷과 이동통신(IC)’ 서비스는 ‘디지털 노마드’가 성장할 최적 조건을 제공한다.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때때로 네트워크는 혼란의 미로로 돌변한다. ‘IC’가 가족과 사회 해체의 허브로 기능하면서 자칫 최초의 ‘디지털 피해국’으로 기록될 공산도 있다. ‘신유목사회’로의 이동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신유목민’은 이민(移民),

이농(離農), 저출산, 수명연장 문제 등과 맞물려 복합적인 사회현상을 함축하는 화두가 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냉정히 직시하는 가운데 인간 소외, 공동체 해체 등 ‘신유목사회’의 그림자를 어떻게 걷어내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해답은 역시 ‘네트워크’에 있다. 유목화한 가족과 사회는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는 그 망(網)을 활용해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과 네트워크를 통해 ‘관심과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적 교류와 유대를 확보할 수 있는 시대다. 아탈리의 말대로 ‘박애’와 ‘관용’이야말로 ‘신유목시대’의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적 토대가 돼야 한다.


1,600여년 전 아틸라 왕은 야만의 세계에 남을 것인가, 혹은 문명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21세기 세계, 그리고 한국도 비슷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이미 도처에서 자라고 있지만 여리기 그지없는 희망의 싹을 잘 키워내기만 한다면, ‘디지털 노마드’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종족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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