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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G 말걸기

조주빈이 악마의 삶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

by 안치용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른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25일 취재진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한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서 연쇄살인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는데, 생각해 보니 끝내 잡히지 않은 희대의 미국 연쇄살인범 조디악이었다. 조디악은 “제발 나를 멈추게 해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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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이 조디악을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드러난 표정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악마의 삶’으로 비유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자존감을 유지하고 제고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엿보였다. 인터뷰에 응한 말투로는, 사과와 악마의 삶이란 멘트를 사전에 준비하고 나온 것이란 심증을 갖게 한다. 그가 학보사 기자였다는 얘기를 들은 듯도 하다.


‘악마의 삶’이란 표현에는,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 성 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한 파렴치 범죄의 당사자란 부끄러움보다는 자신의 상황을 실패로 간주하며 악마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영웅적 인물이었다는 과대망상증적 회피의 심리가 들어 있지 싶다.


특이하게도 조주빈이 사과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남성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남성들에게 사과할 수 있지만, 자신이 성착취 대상으로 삼거나 돈벌이 대상으로 삼은 여성 피해자들에겐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전 국민적 분노의 사건이 된 마당에 마음에 없는 사과를 통해 상황을 모면할 수 없으리란 판단이 선 조주빈으로 하여금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을 있는 그대로 밝히게 하였지 싶다.


조주빈은 자신이 한 일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체포된 다음에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뿌리 깊은 여성혐오 의식이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성범죄에 비해 낮은 수준의 범죄에 대해서는, 남성 권력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행위인 만큼 후회하고 사과할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에서 당연히 극히 일부이겠지만(그렇기를 바라지만)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혐오와 강간문화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조주빈이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한 마디 사과 없이 그런 멘트를 준비해 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따라가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담담한 범죄자와 화가 난 기자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피해자들에게 할 말 없으신가요?”


“범행 후회 안 하시나요?”


경찰서에서 볼펜을 삼키고 머리를 세면대에 찧는 등 조주빈은 자해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결국 그는 정공법으로 죄책감 없이, 사죄없이, 실패한 악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포토라인에 섰다. 기자의 질문에 대신 답하자면 “나는 범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잡힌 것을 후회할 뿐이다. 조디악처럼 되지 못해 안타깝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조주빈이 잡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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