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는 영화이지 좀비영화가 아니다
영화 <반도>를 보았다. 시사회를 놓쳐서 극장에서 관람했다. 영화평론가란 직함을 단 이후 시사회를 놓친 후 극장을 찾아서 일부러 본 영화는 <반도>가 <기생충>에 이어 두 번째이다. 얼마나 재미있게 만들었나 한 번 보자는 생각에 극장을 찾았을 뿐 평을 남길 마음이 없었지만, 자다가 벌떡 일어나 영화평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매우 재능 있고 감각적인 연출에 흡입력 있는 영상이 넘쳐난 작품이었다. 영화 후경의 나름의 성찰까지, 전편 <부산행>을 압도하는 속편이었다.
<반도>는 좀비영화인가?
<반도>에 가해지는 혹평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아마도 <반도>가 좀비영화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지 싶다. 사실 반도는 좀비영화가 아니다. 좀비가 나오는 영화, 혹은 좀비가 주요한 설정인 영화이다. <반도>의 줄거리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기 때문에 여기서 줄거리 소개는 생략한다.
<반도>가 좀비영화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 이후 한국이 어떨까’라는 상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성이 무너지고 야만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삶과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싶어서 기획하게 되었다.”는 게 연 감독의 설명이다. 야만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과 등가일 필요는 없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느 사이 좀비가 존재하는 세계에 적응하는 또는 좀비를 어느 정도 지배하는 인간의 야만성이 <반도>에서 그려진 야만성이다.
예측가능하게 행동하는 좀비보다 야만에 적응해버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더 위협이 된다. 영화에서 그려낸 그대로이다. <부산행>에서 인간을 압도한 좀비는 <반도>에서는 혹한이나 맹수처럼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재난의 목록에 포함된다. 영화 <반도>에서, 돌아온 인간을 사냥하는 건 희망을 잃어버린 채 인간다움을 상실한 ‘좀비’ 인간들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반도>가 좀비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부산행>의 속편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은가?
<반도>를 얼핏 <부산행>과 별개의 영화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데드맨 워킹>과 같은 시리즈물이나 단계별로 난도를 높여가며 좀비를 퇴치하는 게임이 아닌 만큼 <반도>의 차별화는 적절했다고 본다. 그러나 <부산행>을 떼어낸 <반도>는 물론 독립적으로 즐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적 완성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연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좀비들의 경우 어두워지면 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부산행>의 좀비들이 감염된 지 얼마 안 되어 팔팔했다면, <반도>의 좀비들은 폐허가 된 땅에서 오랫동안 지내 노후화하였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했다. 그래서 흙투성이가 되고 지저분한 외형의 좀비가 탄생하게 되었다. 생존자들의 경우 좀비들의 특성을 잘 몰랐던 <부산행>과는 달리, <반도> 속 생존자들은 좀비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소리와 빛에 예민한 좀비들을 다양한 도구로 유인해 공격한다. <부산행>이 달리는 KTX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면, <반도>는 넓은 도심에서 일어나는 설정이라 촬영과 액션의 콘셉트도 많이 달라졌다.”
<부산행>의 좀비가 4년의 세월만큼 변했다는 전제를 관객에게 깔고 감독은 영화를 전개시켰고, 그러므로 더 자유로운 연출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좀비에 집중한 <부산행>의 속편으로서 <반도>는 <부산행> 너머로 시야를 넓힐 역량을 갖추게 된다. 동어반복이 아닌 주제의 변주를 가능케 했다는 측면에서 <반도>는 <부산행>의 탁월한 속편이 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아류가 아닌가?
좀비까지 가세한 제법 긴 분량의 차량추격 장면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떠올리는 관객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전체 구도도 대동소이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나갔다가 들어간다면, <반도>는 들어갔다가 나가는 반대방향을 취하지만 굳이 따지면 기본구도가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세상의 막장을 배경으로 하며 모종의 휴머니즘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구도와 주제의식, 특정한 장면이 비슷한 영화는 많다. 사실 새로 만드는 모든 영화는 기존 영화에 거의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체는 하나의 작품 안에 모든 것이 완결되게 꿰어졌나를 봐야 하는데 <반도>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각각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개인적으로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더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비해 <반도>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반도> 또한 확고한 자신만의 서사와 극화를 갖췄다.
주제의식이 빈약한 것이 아닌가?
<반도>는 <부산행>보다 진전된 세계관을 제시한다. <부산행>을 관통한 세계관은 이분법으로, 단순하다. 좀비 또는 인간이다. 물론 이 이분법이 선악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는 대체로 두 개로 나뉜다.
반면 <반도>에서는 이분법이 무너진다. 반도에서 탈출해 홍콩에 정착한 ‘정석’(강동원) 등은 홍콩 사람들에게 좀비 취급을 당하고, ‘반도’ 내의 인간은 들개와 ‘좀비’ 인간으로 나뉘며, 앞서 살펴보았듯 좀비보다 인간이 더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지만 간섭하고 이분법이 무너지는 가운데 생존 자체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찾는 드문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게 <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정석은 홍콩에서나 ‘반도’에서나 주변인이며 생존을 위한 맹목적 사투의 과정에서 생존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한다. 좀비보다 더 좀비같은 인간을 심심찮게 목격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영화 <반도>가 ‘반도’에서 만들어낸 기이한 사회는 리얼리즘 실현이라고 해도 좋겠다.
새로운 세계를 앞둔 ‘준이’(이레)의 헬기 속 마지막 대사에서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뇌리에 두고 휴머니즘을 떠올릴 법하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대사는 영화 <반도>의 세계관을 뜻한다고 봐도 좋겠다. 야만이 꼭 야만이 아니며, 문명이 꼭 문명이 아니라는.
결말은 적정했는가?
약간의 권선징악과 신파적인 해피엔딩이 버무려진 <반도>의 결말은 당연히 제작진의 선택이다. 제작진은 마지막 장면에서 ‘민정’(이정현)과 ‘서대위’(구교환)를 살릴지 죽일지를 두고 고민했을 터인데, 이 정도 결말이면 납득할 만하지 않은가. 비장한 모성애로 끝냈다면 더욱 신파 같았을 것이고, 훔친 달러를 다시 훔쳐 손에 넣은 ‘반도 탈출 티켓’이 온전히 유효했다면 그것도 악당의 문법에 맞지 않는다. 확실히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는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등장인물 중 예상대로 살릴 만한 이들을 살리는 게 나쁘지는 않다. 살리는 방법이 너무 ‘영화적’이긴 하지만, 어차피 영화를 볼 생각에 <반도>를 본 것이지 않은가. 막판에 예측할 만한 반전을 넣은 것이나 약간 시간을 끈 것은 전반적인 속도감과 화끈한 전개를 감안할 때 큰 흠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