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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9. 2022

27회 부국제가 발굴한 한국 영화의 젊은 가능성

<괴인> <빅슬립> <비닐하우스> 등 일상 닮은 ‘삶의 자리’ 영화들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성서비평학에서 쓰는 개념이다. ‘삶의 정황’으로도 번역된다. 성서의 구절을 해석할 때 특정 구절이 갖고 있던 원래의 맥락을 제거하면 구절의 본래 의미가 상실돼 오독의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삶의 자리’라는 개념을 강조하게 됐다. ‘본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문이 없지는 않으나 ‘삶의 자리’까지 고려하면 더 나은 해석에 도달할 확률이 높아지긴 한다. 이 용어는 신학 외 다른 학문에 사용돼 특정한 텍스트의 사회적 맥락을 규명하려는 어떤 연구 자세를 지칭하게 된다. 나아가 ‘삶의 자리’는 학문의 방법론이란 단어 본래의 맥락을 떠나 그저 ‘삶의 자리’를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이때에도 그 ‘삶의 자리’가 사회적 맥락과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삶이란 것에서 맥락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정홍 감독의 <괴인> /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이정홍 감독의 <괴인> /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3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BIFF


 ‘다시, 마주보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난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대해 이용관 BIFF 이사장은 14일 KNN시어터에서 열린 결산 기자회견에서 “3년의 공백을 딛고 무난하고 안전한 마무리를 통해 팬데믹을 끝내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이번 BIFF에는 71개국 242편의 작품(월드 프리미어 88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13편)이 공식 초청돼 16만1145명의 관객(좌석 점유율 74%)을 만났다.


지난해 69명에 그쳤던 해외 게스트가 영화제의 완전 정상화와 함께 1694명으로 급증했고, 국내 게스트는 4712명에 달했다. 304회의 GV(감독이나 배우, 영화 관계자들이 직접 방문해 영화를 설명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도 하는 무대)를 비롯해 오픈토크, 포럼 비프(Forum BIFF), 시네마투게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과의 접촉면을 넓히고 축제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양조위의 화양연화’ 특별전은 이번 BIFF에서 특히 인기를 끈 행사였다.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2019년 대비 80~90%의 정상화를 내부 목표로 삼았는데 양적으로는 90% 가까이, 질적으로는 100%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평했다.


올해 BIFF 최대 화제작은 신예 이정홍 감독의 <괴인>이었다. <괴인>은 자이샨카르 아리아르 감독의 인도영화 <그 여자, 쉬밤마>와 함께 뉴 커런츠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KBS독립영화상, 크리틱b상까지 4관왕에 올랐다. “혁신적인 촬영기법을 통해 한집에 있는 인물 간의 독특한 순환고리를 만들어내며 아주 현대적인 세계관을 쌓아 올린 작품”이란 선정평을 받은 <괴인>이 이 감독의 첫 번째 장편연출작이란 사실에서 그에 대한 기대를 더하게 한다.


<괴인>이 좋은 평가를 받은 BIFF 화제작이긴 하나, 실제 개봉했을 때 관객으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에서 기이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괴인>의 캐릭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유형이다. <괴인>에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특별한 상황도 제시되지 않는다.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보편적 상업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관람 후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만도 하다.


<괴인>의 영어 타이틀은 ‘A Wild Roomer’이다. ‘거친 세입자’란 뜻의 영어 제목은 인물의 특성을 표현하는 데 머문 한국어 제목과 달리 공간성을 부각시킨다.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 /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삶의 자리’ 영화 <괴인> 


BIFF 4관왕 <괴인>의 주인공인 목수 기홍은 전술한 대로 ‘괴인’이 아니다. 작은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형이다. 영화는 인테리어 공사 현장인 피아노학원에서 기홍이 술에 취해 밤늦은 시간에 잠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공사 중인데다 심야여서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인기척 같은 게 느껴지지만, 기홍은 같이 일하는 친구와 달리 무심히 잠든다.


영화는 이후 관객의 예상과 어긋나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영화의 주요 무대는 기홍이 세 들어 사는, 셋집과 주인집이 각자인 듯 하나인 듯한 독특한 구조의 단독주택이다. ‘A Wild Roomer’라는 영어 제목을 보면 세입자인 기홍이 뭔가 특별한 사건을 일으킬 법하지만, 세입자는 실제로는 얌전한 세입자이고, 이야기인 듯 아닌 듯한 모호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그 공간에서 느닷없이 이야기가 끝나는 식으로 영화를 구성했다. BIFF가 밝힌 ‘뉴 커런츠’ 후보작 선정 이유가 <괴인>이란 영화의 성격을 잘 설명한다.


“<괴인>은 어려운 장면이 한군데도 없는데 설명하자면 어렵다. 모든 인물은 예상에서 조금씩 비켜나 있다. 한가로움 속에 위태로운 격류가 자리하고, 한없이 신중한 가운데 능청스러운 유머가 등장하며, 저 좁고 긴 골목과 통로의 사이 공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매한 관계와 거리감을 떠올리게 한다. <괴인>의 절대적인 매혹은 아무런 주장이나 논변도 없이, 그저 비켜나 흐르고 있는 저 상태와 리듬의 강인함에 있다. <괴인>은 너무 신기해서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다.”


정한석 BIFF 프로그래머의 해설에는 ‘위태로운 격류’라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동의한다. 인물뿐 아니라 상황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설명하기는 힘들다. 또한 인물과 상황이 특별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항상 예상대로인 것도 아니지만, 예상에서 벗어난다고 해봤자 그게 살짝 벗어나고 마는 정도다.


이러한 인물과 상황은 ‘영화적’이지 않다. <괴인>이 그린 이러한 상황과 인물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닮았다.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제공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 /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제공


‘영화의 자리’를 떠난 ‘삶의 자리’ 


이 영화를 흔쾌히 만족할 만한 영화라고 평가할 관객이 많지는 않을 듯하다. 소위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는 게 실상에 부합한다.


영화는 고유의 문법과 표현을 통해 대중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제공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왔다. 애초에 관객은 영화에서 일상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삶의 자리’를 떠난 영화를 보기 원했다. 평범하고 남루한 삶의 현장을 꼭 극장에 가서 봐야 할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영화인은 영화 텍스트를 구성하면서 어떻게 하면 ‘삶의 자리’를 정교하게 떠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즉 영화 제작자가 디딘 지평은 ‘삶의 자리’가 아닌 ‘영화의 자리’다.


‘영화의 자리’에서 영화는 항상 더 특별하고 강한 자극과 더 참신하고 세련된 구성을 요청받는다. 후배 영화인은 언제나 선배의 영화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모든 예술 분야의 특성이지만 가장 자본주의적인 대중예술인 영화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인 관객이 그동안 경험한 것과는 다른 결말, 다른 반전을 제공하는 데에 영화산업은 강박적이다. 반도체산업에서 통용된 ‘무어의 법칙’이나 ‘황의 법칙’이 ‘영화의 자리’에서도 적용돼야 했다.


글로벌 경제에선 천문학적 자본이 투하된 경쟁체제가 작동하기에, 즉 배후에 거대자본이 있기에 반도체의 고도 집적화가 가능했다면, 영화산업에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처럼 영화에선 경쟁의 한방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한계를 넘어서는 ‘고도집적’의 경쟁 대신 아예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한 그룹이 말하자면 ‘삶의 자리’ 영화인 셈이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이론상 무한경쟁이 가능하다. 무한은 무엇을 더하든 무한에 도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삶의 자리’ 영화는 디지털화를 탈피해 아날로그로 복귀한 것에 비견된다. 반전만 놓고 얘기하자면, ‘영화의 자리’의 감독 등 제작자는 관객이 본 기존 결말에서 한걸음 더 나가려 하는데, ‘삶의 자리’에서는 반전 경쟁에서 반전 자체를 없애는 도발적 결말을 모색한다. 지지부진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시시한 사건이라도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잠을 청하는 결말의 <괴인>이 말하자면 이 사례의 대표격인 셈이다.


아시아 영화를 전공한 어느 외국계 심사위원은 “홍상수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홍상수 영화와) 다른 면이 없지는 않고 약간 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촌평했다. 물론 <괴인>이 이정홍 감독의 첫 번째 장편연출작이니 앞으로 더 성숙하고 발전하겠지만, 홍상수보다는 사회적 전망이 구체적인 게 그가 말한 다른 점이 아닐까. ‘삶의 자리’엔 온갖 모순이 중첩돼 있어 ‘영화의 자리’에서 그러하듯 확고하고 뚜렷하게 정련된 무엇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부조리하고 불편한 삶의 총체를 담아낼 수 있다.


감동 없는 우리 삶의 수면 아래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오로라미디어상, 올해의 배우상의 ‘BIFF 3관왕’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은 <괴인>보다는 ‘영화적’이다. 배우 김영성이 연기한 극중 기영이라는 캐릭터는 김영성이 배우상을 받은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다소 전통적 상황과 서사 안에 위치한다.


매력적인 영화적 캐릭터인 기영은, 그러나 더 영화적인 범주로 점프하지 않고 평범한 보통의 생활인에 머문다. 30대의 미혼남 기영이 길호(최준우 분)라는 가출청소년과 쌓아가는 우정이 영화의 핵심 소재다.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히 따뜻한 캐릭터인 기영을, 얼핏 넘치는 듯하지만 절제된 연기를 통해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출근길의 기영은 자신의 집 앞 평상에서 작은 온열기에 의지해 잠든 가출청소년 길호를 목격한다. 유년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한 기영은 결국 길호를 집으로 들인다. <괴인>과 비교해 이 영화에는 사건다운 사건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을 한다. 그렇다고 유혈 사태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폐막식


<빅슬립>은 제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Big Sleep)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제목 말고는 같은 게 없다.


가정폭력과 청소년범죄의 실상을 다큐멘터리 못지않게 <빅슬립>이 잘 담아냈지만, 세대차를 극복한 우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서인지 다큐성이 거슬릴 정도로 부각되지는 않는다. 가출청소년의 폭력성 또한 그러하겠다는 개연성 내에서 그려진다. 자본가의 탐욕과 탐욕의 구체양상인 폐기물 무단투기가 기영의 삶에 마뜩잖게 끼어들지만 큰 긴장이나 갈등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자본가도 조무래기 자본가다. 가출청소년과 기영이 관계를 맺는 과정의 후경으로만 존재한다.


기영의 성격이 살갑지 않아 더 설득력이 있다. 대단할 건 없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자신의 공간이 있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자존감 약한” 사람인 기영이,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가출청소년을 구해내는 모습이 느릿하게 극화된다. 이것을 거창하게 ‘구원’이라고 부른다면 연출 취지에 어긋난다. 손 내밀어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잔잔한 공생의 형상화 정도로 정리하면 되지 싶다.


소설 <빅 슬립>의 하드보일드는 영화 <빅슬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미약한 온기가 그려진다. 미미한 체온을 나누는 ‘삶의 자리’의 감동 같은 것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김태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빅슬립>의 결말은 <괴인>과는 결이 다르고, 조금 더 의미화가 개입했지만 어쨌든 동일하다. 그냥 잔잔하게 약간은 예상에 어긋나게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두 영화가 같은 결말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다.


CGV상, 왓챠상,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한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는 앞의 두 영화에 비해 훨씬 더 영화적인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의 제15기 장편제작 연구과정 작품이다. 막 프로의 세계로 진입하는 감독의 발랄한 작품이란 뜻이다.


살 집이 없어 비닐하우스에 기거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요양보호사 문정(김서형 분)에게 밀어닥친 비극적인 사건을 속도감과 박진감 있게 그렸다. 범죄 드라마이자 스릴러라고 할 때 지금 분류법으론 외관상 ‘삶의 자리’보다는 ‘영화의 자리’에 속한 작품 같다.


“리얼리티를 살린 배우들의 명연기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장면에 긴장감을 더하고, 엔딩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CGV상 선정 이유는 <비닐하우스>가 보다 일반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의 범주에 속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스토리라인과 반전이 주요한 방법론으로 활용됐다는 측면에서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는 문정을 비롯해 등장인물 가운데 악인이 한명도 없지만, 죄가 일어나고 비극이 확대되는 구조를 취한다. <빅슬립>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악행을 일삼으며 거대 체계에 속해 살아가는 개인이 체계에 순종하며 악을 만들어내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유(類)의 현상을 설명한다면, <비닐하우스>는 도덕적 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선량하고 평범하며 성실한 인간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지만 개미지옥에 떨어진 개미처럼 비극으로 휘감겨 들어가는 현상을 그렸다. 선의의 남루함과 삶의 잔혹을 블랙코미디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그렸다는 측면에서 어쩌면 이 영화 역시 ‘삶의 자리’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서형이란 배우가 만들어낸 문정이란 캐릭터는 ‘삶의 자리’ 비극성의 전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번 BIFF의 화제작 3편에서는 공통적으로 사회성이 버무려진 영화적 감성이 우러난다. 정색하지 않고 사회성을 앞세우지 않아 더러 당의정처럼 유익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더러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비판의식이 영화에 녹아든 것은 사실이다. 비판의식이 영화의 바다 위에 빙산처럼 둥둥 떠다니면 그것 또한 영화다. 빙산이 장엄할수록 아마 좋은 영화로 평가받을 것이다.


<괴인>, <빅슬립>, <비닐하우스>에선 빙산이나 부유하는 빙하가 보이지 않는다. 얼핏 민물처럼 보이지만 소금이 잔뜩 녹아 있는 짠 바닷물만 있고, 그것이 격랑 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추적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후자의 풍경은 전자에 비해 밋밋하지만, 삶의 진실에는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세 화제작에서, 정해진 주거지 없이 빈집 등 남의 집에서 몰래 사는 프로깅(phrogging) 등 주거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 또한 묘한 공통점이다.


결단과 점프 없이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는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형상을 이 젊은 감독들은 신중하게 보여준다. “아무런 주장이나 논변도 없이, 그저 비켜나 흐르니” 당연히 어떻게 하라는 제안 같은 것은 없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일단 졸리니까 자고 보자는 <괴인>과 <빅슬립>의 엔딩처럼 많은 것을 유보로 남긴다. 우리네 삶이 원래 ‘삶의 자리’라는 많은 유보로 채워지듯이 ‘삶의 자리 영화’ 또한 유보를 기본값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


<안치용 ESG 연구소장·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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