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영화리뷰) '잠'
<잠>은 몽유병을 소재로 한 영화다.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에게 느닷없이 시작된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과 그에 따르는 공포, 그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렸다. 맞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뭔가 내용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왜일까. <잠>에서 연출과 각본을 맡은 유재선 감독이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영화적 줄타기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경계에서, 혹은 줄타기
영문학의 걸출한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년)는 대표작 『롤리타』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겼다.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나는 바로 그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왜 그럴까?” 나는 이 문장이 나보코프의 문학관을 압축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잠>에서 이 문장이 생각난 이유가 아마 “만나는 지점”과 “경계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좁은 공간에서 아주 적은 인물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므로 당연히 압축과 절제가 필요하고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된다. 잔가지를 툭 툭 쳐내며 굵직하고 간결하게 끌어나가다가 필요한 지점에서 정교하게 치고 들어와 관객을 휘어잡는다.
모두 3장으로 구성됐고 상영시간이 94분으로 요즘 영화치곤 짧은 편이다. 다양한 이항대립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체계화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대립구도는 ‘잠들기 두려운 자’인 남편 대 ‘잠들지 못한 자’ 아내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몽유병에 걸린 남편과 그런 남편을 애정으로 감싸며 치료하려는 아내. 남편 또한 몽유병을 고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치료에 있어서 주도권이 아내에게 있다. 극의 흐름상 아내에게 주도권을 주는 게 불가피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유 감독은 “영화의 전반부가 수진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현수의 공포”라며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서서히 변하는 공포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몽유병, 그것도 심각한 수준으로 발병한 몽유병에서 공포가 촉발하고, 이 공포가 두 사람을 동시에 지배하지만 크게 보아 공포의 방향이 ‘남편→아내’에서 ‘아내→남편’으로 바뀐다는 얘기다.
여기서 ‘공포’를 정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영화가 우리말로 공포를 공들여 또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는 평가가 가능해 보이는데, 만일 공포를 영어 ‘호러’로 바꿔 쓰면 약간 갸우뚱할 수 있다. 즉 이 영화가 호러무비인가라고 물으면 그렇다는 대답과 아니라는 대답이 모두 나올 것이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전형적인 호러무비는 아니다. 그렇다고 소위 전형적인 호러무비의 요소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외형상 스릴러 요소가 강해 보이지만, 저변엔 호러무비의 문법이 깔려 있다.
단순하게는 몽유병이냐 접신이냐에 따라 이 영화가 스릴러물인지 호러물인지 판가름 날 텐데, 실제로는 구분하기 힘들다. 외형상 몽유병과 접신 중에서 어느 쪽인지 단언하기 힘든데다, 감독이 영화적으로 두 장르를 섞어 버렸으니 당연하다. 두 가지 성격이 영화에 공존하고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결론을 유보한다. 마지막에 퇴마 의식이 나오기는 한다. 흔히 상상할 만한 그런 퇴마의식이 아닌데다 그것이 퇴마 의식이라고 해서 <잠>을 퇴마 영화라고 부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가 들어왔어”
영화 초반에 현수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 즉 몽유병에 걸리면서 내뱉은 대사가 “누가 들어왔어”이다. 접신을 상징하는 대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면, 극중 직업이 배우인 현수의 극 안의 대본상 대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문장이 양가적으로 활용된다. “누가 들어왔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주인공 두 사람이 대립한다. 이 문장이 영화에서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한다.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두고 내내 갈등이 지속된다.
부부에게는, 동시에 관객에게 병에 걸린 것과 귀신 들린 것이 다르다는 인식이 있다.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이 구분법에서 아내는 후자에 더 확신을 두게 된다. 남편 또한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명료하지는 않다. 의사와 무당이 동시에 나오고 치료와 주술이 병행하는 게 이러한 이항대립의 결과물이다. 참고로 근대 이전에는 병에 걸린 것과 귀신 들린 것 사이에 크게 차이를 두지 않았다.
영화는 현대인의 인식체계에 따라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서 보여주되, 연출에서는 고대인처럼 두 가지를 종합하여 형상화한다. 부부의 관계에서 흐름이 변하는 건 공포의 작용방향 외에 많다. 대표적으로 초반에 남편이 몽유병에 걸린 병자라면, 후반엔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병자가 된다. 남편이 잠들 때만 병을 앓는 반면 아내는 깨어 있을 때 병을 앓는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지, 누가 병자이고 누가 건강한지 시간이 갈수록 혼동된다. 구분을 지우는 연출 때문이다.
『롤리타』의 인용문처럼 경계선의 확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을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잠>의 연출은 경계선의 확인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확인이 계속해서 지연되어 관객이 극장 문을 나갈 때까지 이어진다.
현수의 직업이 배우인 것이 우연한 설정은 아니다. 현수는 극중에서 정말 귀신이 들린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 귀신 들린 것으로 연기했어야 했을까. 초반에 귀신의 생전 모습을 흉내내는 장면은 복선이다. 관객의 가장 큰 궁금증은 마지막에 과연 퇴마가 성공했나 일 것이다. 무던한 관객은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예민한 관객이라면 의문을 품을 듯하다. 귀신이 현수의 몸에서 사라지는 모습은, 오직 수진의 망막에 비친 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영화 속의 진실은 관객에게 오리무중으로 남는다. 카메라가 비춘 게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상이니 말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영화적 디테일로는 이렇게 활용된다.
성공적인 데뷔
<잠>은 2023년 5월 21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처음으로 공개됐다.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 에이바 카헨은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 <잠>은 졸릴 새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감독은 고군분투하는 젊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전과 후에 대한 센세이셔널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라고 <잠>을 초청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그밖에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등 여러 유수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유 감독은 입봉작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