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영화평 <청년 마르크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일단 반가운 영화이다. 요즘 보기 드물어진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이든, 그저 막연한 진보주의자든, 혹은 꼴통 보수주의자라 하여도, 세계와 대면하여 그 의미를 찾고자 한 사람 가운데서 카를 마르크스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정도와 방향의 차이이지 싶다.
<청년 마르크스> 제작사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젊은 날을 담은 영화”라고 이 영화를 소개한다. 2018년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마르크스의 젊은 날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란 표현에 대해선 찬반양론이 맞설 것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로 설명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란 규정은 이 영화를 만든 라울 펙 감독의 시각인 듯하다. 개인의 생각은 언제나 자유지만 그 생각이 소통되어 공론의 장에 얹힐 때 그 생각은 토론의 대상이 된다. 마르크스가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데에 나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국외는 논외로 하고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판단에 동의할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마르크스가 위대한 철학자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과 별개로 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마르크스는 확실히 위대하게 그려졌다. 연출이 위대하다는 게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를 위대하게 연출했다는 뜻이다.
영화가 다루는 마르크스의 청년기는 라인신문이 폐간당할 때인 1943년에서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1848년까지다. 마르크스가 1818년생이니 30살이 되는 해까지 20대의 후반을 그렸다.
영화는 버디무비로 제작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지성이 넘치는 브로맨스!”(가디언). “이 작품의 진정한 로맨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끈끈한 우정이다”(BBC). 이런 해외 언론의 영화평을 참고하지 않아도, 사실 엥겔스 없는 마르크스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만나서 친구가 되고 평생의 동지로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공산당선언을 공동 집필하는 것까지가 스토리의 얼개다. 동시에 두 사람 각각의 여성 반려자를 등장시켜 공산주의의 비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랑을 그린다. 핵심 키워드를 대라고 하면 우정과 사랑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아니라 ‘청년 아무개’를 그린 다른 영화라 해도 거의 같았을 핵심 키워드이다.
우정과 사랑만큼 청년의 가슴을 뛰게 하고, 청년기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여기에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선 혁명이 추가된다.
우정과 사랑, 그리고 혁명이란 구성은 이 영화에 대중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당시 역사에 관한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마르크스(오거스트 딜)와 엥겔(스스테판 코나스케)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어도, 누구나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등은 여느 버디무디와 다를 바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도 전형적이다. 사실 혁명가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긴 하다.
두 사람이 혁명가이긴 하지만 주로 이론가였기에 ‘혁명’의 모습은 논쟁의 형태로 표현된다.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립하는 과정이 영화 속에서 전개된다. 그 상대역으로 푸르동, 바쿠닌, 바이틀링 등이 나온다. 책에서나 읽었던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을 한꺼번에 불러내어 각자에게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포함해 주요한 역사적 인물의 성격을 형성하는 과업이 아마도 연출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젊은 날
라울 펙 감독이 『자본론』의 저자이자 변혁의 사상가로 알려진 마르크스의 젊은 날을 조명한 <청년 마르크스>를 만든 까닭은 마르크스의 기존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펙 감독은 마르크스와 관련한 전기와 연구를 6년간 검토하여 영화화를 진행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혁명의 절정 속에서 검열이 난무했고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한 편으론 지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안에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예니의 여정을 깊게 다루기 위해 딱딱한 이미지로 남은 턱수염 가득한 노인 마르크스의 모습은 밀어두려고 했다.”
이러한 연출의도에 따라 감독은 1843년부터 1850년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고받은 방대한 편지들과 그 외 주요 인물 간의 서신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마르크스의 청년기를 다룬 최고 학자로 손꼽히는 레이몽 아롱의 강의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광범위한 관객을 아우르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 예니의 젊은 시절과 그들이 겪은 수많은 시도와 시련, 그리고 세 사람의 우정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가혹한 영국의 공장들, 맨체스터 거리의 빈민굴,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황금으로 뒤덮인 파리의 부유층, 도서관의 실내장식 등을 화면에 담았다. 이러한 대비 속에서 당시의 불평등과 계급갈등,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청년들의 열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영화의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배우들 또한 3개 국어로 연기해야 했다. “역사 속 실제 마르크스, 엥겔스, 예니가 다양한 언어로 서신을 교환했던 것처럼 배우들이 진짜가 되길 원했다”는 감독의 생각에 따라 <청년 마르크스>의 주요 세 배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예니가 그랬듯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연기하게 된다.
대중성의 함정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거의 실존인물이다.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과거 역사에 실존한 인물을 영화에 불러낼 때의 연출은 곧바로 역사의 해석이 된다. 연출과정에서 크나큰 왜곡이 있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앞서 감독이 의도한 대중성에 따라 미세하고 일관된 의미부여는 눈에 띈다.
과하게 말하면 감독이 <청년 마르크스>를 무협지나 만화처럼 끌고 나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천재이긴 하여도, 또 당대의 지성이 지금에 비해 조숙했다 하여도, 주인공 청년 두 사람은 청년이면서 이미 너무 완성돼 있다. 토론 배틀에서 매번 압도적으로 적들을 패퇴시킨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멜로의 주인공이자 무협지의 주인공이 돼 버린다. 그것도 완벽하게. ‘완벽’은 일종의 흑백논리여서 완벽한 주인공의 반대편은 항상 일그러진다.
이러한 전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전제 아래 대중성을 너무 의식한 감독의 연출 탓이지 싶다. 마침내 마지막에 공산당선언을 통해 영화는 짜잔 하고 영웅탄생을 세상에 알린다. 그러한 <청년 마르크스>의 대미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예상한 대로 어쩐지 덜 감동적이다. 영웅탄생에 이르기까지 포함되게 마련인 굴곡과 시련이라는 전통적 영웅서사의 장치마저 약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엥겔스를 논외로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첫 장면부터 영웅이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웅이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청년 마르크스>의 마르크스는 고대의 영웅과 달랐고, 근대의 영웅과도 달랐다. 직접 연출할 궁리를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청년 마르크스를 영웅이 아니라 인간으로 그리는 방법은 없었을까. 마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여서 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설령 영웅서사를 결행키로 했다 하였어도 상투성을 피하려고 노력했으면 더 볼만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극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영화는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다만 친근하고 대중적으로 ‘영웅’을 그려낸 방식은 마르크스에 대한 우리 사회 저변의 거리감을 줄이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고 기대하게 한다.
Like a Rolling Stone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중음악가 밥 딜런의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이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저항가수 밥 딜런의 노래가 청년 마르크스ㆍ엥겔스와 어울렸는지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그냥 그 자체로 좋은 노래이긴 하다. 밥 딜런의 곡과 함께 마르크스 사후 지금까지 전개된 현대사의 중요 장면이 나열된다. 공장의 노동자들, 흑인 노예시장, 시위 현장, 국경을 넘는 난민들, 하늘을 나는 미사일, 폭격당하는 땅, 체 게바라, 존 F. 케네디, 마가렛 대처, 넬슨 만델라, 주식시장과 불타는 화폐 등.
<청년 마르크스>의 결론에 해당하는 <공산당 선언>과 연결지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의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의도로서 존중받을 수는 있지 싶다. <청년 마르크스>가 역사의 후주라기보다 어느 정도 감독의 자율성이 용인되는 극화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