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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Mar 07. 2018

후아레스의 ‘호모 사케르'와 ‘#미투’

[영화평] <보더타운>은 세계화 시대의 사건을 어떻게 예술로 구현했나 

영화 <보더타운>(2007, 감독 그레고리 나바)은 한국 영화 <1987>(2017, 감독 장준환)보다 10년 먼저 개봉됐다. <1987>이 1987년 민주화운동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시대극이듯, <보더타운> 또한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의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일종의 시대극이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두 시대극의 성격은 판이하다.


영화 <보더타운>의 모티프이자 소재인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의 연쇄살인 사건은 피해자가 방대한 규모로 존재하고(영화 속에선 실종자를 포함한 전체 피해자 규모를 5,000명으로 추정하는 언급이 나온다. 공식 집계로도 피살자는 수 백 명에 달한다.) 주로 젊은 여성 공장 노동자를 노린 범죄라는 특징을 보인다. 전후 현대사에서 가장 엽기적이고 괴이한 사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피해자가 멕시코 국적의 여성이고 범죄가 멕시코 국경 안에서 일어나지만 이 사건이 확고하게 세계화의 현상이라는 점 또한 명기되어야만 한다. 


근대국가에서 국민과 국경은 중요하다.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국민국가 시대에서 특정 국가에 국민으로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보편적 인간으로서 어떠한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국민국가를 탈출한 또는 국민국가에서 배제된 난민들이 세계시민으로서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지만 그들은 인권(人權)에서 고립돼 마침내 인간 자격을 상실한다. 멕시코 국민인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멕시코 영토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살해된 사건은 얼핏 이 진술과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권 자체에서 배제되었다기보다는 적은 인권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견상의 위배는, 이제 이 지구 상에 국경으로 휘감아지지 않은 땅이 한 쪼가리도 없으나, 동시에 상업화 혹은 시장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 또한 한 평도 남아 있지 않다는, 즉 국경 안에 속박된 국민국가와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 시장화 사이의 불일치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를 접한 멕시코의 국경도시 후레아스에서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주권권력의 잠정적 유예와 (살해에 노출된) 벌거벗은 생명의 만연이 목격된다.


<1987>이 두 명의 ‘엘리트’ 남성 청년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주권의 문제를 다룬 반면 <보더타운>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몰린 다수의 젊은 하층 여성의 주권 유예 하의 끔찍한 현존을 그린다. 

     

국경도시의 호모 사케르가 직면한 이중의 폭력

     

후아레스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는 어떻게 ‘호모 사케르’가 되었을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뜨는 자막의 약자(acronym) NAFTA가 단서이다. NAFTA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뜻하며 미국 엘패소와 다리로 연결되는 멕시코 후아레스는 국민국가(nation) 멕시코의 북단 국경도시로서 자유무역협정(FTA)을 상징한다. FTA가 상품의 국경을 없앰으로써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국민은 TV 같은 상품과 달리 국경을 마음대로 넘지 못한다.


멕시코 상품과 달리 멕시코 사람은 리오 그란데(Río Grande)를 자유롭게 월경할 수 없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본은 국민국가인 멕시코로부터 멕시코 국민을 잠정적으로 양도받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를 받는 멕시코 국적의 여성 노동자는 주권권력이 보호를 포기한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따라서 극중 에바(마야 자파타)와 같은 여성 노동자는 “아무나 죽여도 되지만 죽음의 값은 무(無)인” ‘호모 사케르’로 재정립된다. 영화 속에서 디아즈(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여자를 죽이고 싶으면 후아레스로 오면 된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한 여자가 ‘호모 사케르’이다.


국민국가의 주권권력을 포기함으로써 생성된 ‘호모 사케르’의 공간은 자유무역을 겨냥해 설립된 마킬라도라(Maquiladora)라는 대형 공장이다. 자막에서 약 1,000개로 추정된 후아레스 마킬라도라 노동자의 푸른 노동복은 사막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호모 사케르’의 수의이다. 


20세기 말~21세기 초에 후아레스에서 목격된 ‘호모 사케르’는 이중으로 벌거벗겨진 존재이다. 주권권력의 의미를 정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로 확장하면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역사가 오래됐고 가장 많은 살해가 일어난 ‘호모 사케르’는 여성이다. 남성지배의 기나긴 역사에서 그 역사만큼 오래된 혐오의 대상인 여성.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여성과 노예가 민주주의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사실(史實)이 새삼스럽지 않듯, 지난 인간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했다. 자본에 의해 가정에서 공장으로 동원된 여성은 자본의 지배를 받는 노동이 됨으로써 다시 한번 무가치해진다. <자본론>에 잘 묘사되었듯이 여성 노동은 아동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이 선호하는 노동으로서 남성 노동과 분리되는데 이러한 분리는 부르주와지의 대자적 존재로 정립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여성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여성은 현대 멕시코 후아레스 마킬라도라의 여성으로 재현되고 중첩된다.


두 국적 앞에 선 두 종류의 세계시민

     

영화의 등장인물은 멕시코인 아니면 미국인이다. 대사가 주로 영어이지만 에스파냐어도 종종 등장한다. 국적과 언어가 양쪽에 걸쳐진 반면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의 혈통은 모두 멕시코이다. 


주인공 로렌으로 분한 제니퍼 로페즈에게서 한눈에 라틴계 외모를 파악할 수 있다. 로페즈가 1969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한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극중 미국 신문의 기자로 등장한 그는 이러한 외모를 배경으로 멕시코인으로 설정된다. 멕시코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에 농업노동자로 일하러 온 부모를 따라 어린 나이에 미국ㆍ멕시코 국경을 건넜다.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부모가 총격에 사망한 후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길러진다. 


로렌은 멕시코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길러졌다. 멕시코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인 부모에게서 양육된 일종의 태생적 분열이 극중 인물 로렌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태생적 분열은 나중에 로렌의 정체성 위기로 폭발한다. 힘들여 작성한 후아레스의 여성 연쇄살인 기사가 자본의 통제에 의해 보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마킬라도라의 노동자일 수 있었고, 내가 사막에 누워 있는 시체의 하나일 수 있었다”라고 로렌이 편집국장에게 말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성폭행당한 뒤 살해당할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나중에 로페즈와 함께 살인자들에 맞서 싸우는 에바는 멕시코에서 태어나 멕시코 국경 내에서 멕시코 부모에게서 길러진 멕시코인이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로렌이나 극중 멕시코 상류사회 구성원들과 다르다. 비교적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멕시코에서 에바와 같은 순수 원주민 혈통의 외모는 지배계급의 외모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에바는 미신을 믿는 인디언으로, 비슷한 용모의 사람들과 함께 후아레스 변두리의 슬럼에 살고 마킬라도라에서는 푸른 작업복을 입고 노동한다. 


에바의 외모는 그가 멕시코인이면서 동시에 디아스포라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로렌과 대화하는 중에 밝힌 에바의 고향은 멕시코 남서쪽의 오하카(Oaxaca). 후아레스엔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니라 고향에서 정부가 그의 가족의 땅을 빼앗는 바람에 최북단 국경도시로 떠돌아 들어오게 됐다는 설정이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서 고향 땅을 약탈한 멕시코 정부는 후아레스에서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로렌과 대화에서 에바는 마킬라도라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돈을 못 버는데, 정부와 공장이 가져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래 에바에게 국가는 주권권력이자 약탈자였다. 오하카에서 주권권력이자 약탈자였던 국가는 자유무역지대인 후아레스에선 에바와 같은 노동자에 대해 주권권력을 잠정적으로 유예함으로써 순수하게 약탈자로만 남게 된다. 국가와 조직 폭력배 사이의 차이가 소멸하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기업이 주권자가 될 수는 없기에 잠정적 주권권력의 유예 상태에서 기업, 국가, 깡패집단이 약탈자로 경합하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된다. 


영화에서 잠깐 말로만 언급되는 에바의 아버지 또한 약탈당하는 디아스포라이다.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일하러 갔는데 몇 년째 소식이 없다. 에바의 짧은 언급과 로렌의 회상을 통해 관객은 로렌과 에바에게서 이주노동자 아버지라는 공통분모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공통분모의 힘이 미약한 것이어서 두 사람은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때때로 갈등한다.


극중에서는 멕시코의 유력가문 살라망카 가(家)가 등장한다. 후아레스에서 에바가 일한, 그리고 로렌이 ‘위장취업’한 마킬라도라의 소유주이자 파티에서 조우해 로렌과 하룻밤을 즐기게 되는 훈남 마르코 안토니오 살라망카(후안 디에고 보토)는 살라망카 가의 일원으로 분명 멕시코인이지만 동시에 미국 국적을 보유한다. 이중 국적자이지만, 에바와 로렌과 달리 그에게는 그에 따른 분열과 이중성이 발생하지 않는다. 원래 자본에게는 국경을 초월하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어 자본에게 국적이 무의미하며, 동시에 자본가는 저절로 세계시민이 된다. 마르코가 이중국적자가 아니어도 그는 세계시민이었을 테지만, 이중국적을 부여함으로써 극적 맥락이 더 명쾌해진다. 극중 인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이중 국적자인 살라망카 가의 멋진 남자가 유일하게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 따라서 당연하지만 역설적이기도 하다. 



자본가는 유일한 세계시민이며 자본은 최상위 현실이다  


인간의 분열과 정체성의 혼란은 대체로 그에게 제시되는 현실이 일관성과 논리를 상실할 때 일어난다. 영화가 시작하고 4분의 1쯤 지났을 무렵 일종의 안가(安家)인 테레사 카실라스(소냐 브라가)의 저택 정원에서 에바는 꽃 냄새를 맡으면서 말한다. 


“현실 같지가 않아요.”(It doesn't seem real.)


로렌이 답한다. “It’s real.” 슬럼가 출신 소녀인 에바가 최초로 경험한 ‘정상적인’ 삶의 풍경을 두고 두 사람이 벌인 문답이다. 아마도 두 화자가 말한 “real”에 뉘앙스 차이가 존재했겠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현실 앞에 선 두 사람의 상이한 인식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현실의 맥락에서 흘러와 우연히 정원에서 한 가지 현실을 함께 조우했기에 비롯했을 터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같은 현실을 마주 대한다고 해도 개개 인간에게 그 현실은 다르게 수용되고 의미화하는데, 인간에게 현실은 구분된 별개의 장면이 아니라 적분된 현실의 단면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문답에서도 차이는 확인된다. 살인범이 에바의 도주 사실을 알고 찾아왔다는 얘기를 하며 에바는 악마(The devil), 즉 살인자가 진짜로 있었다(was)고 말하지만 로렌은 그것은 네 환상이라며 진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It wasn't real.” 


어느 게 진짜 현실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인간 각자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모두 현실일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 타인의 현실을 마주할 용기와 결단, 그리고 소통이 공통의 현실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에서 로렌과 에바가 함께 찾아낸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의 현실, 혹은 진실은 또 다른 거대 현실 앞에서 좌초한다. 기사 보도가 보류된 후 급거 귀국한 로렌이 편집국장 조지 모건(마틴 쉰)과 논쟁하는 장면을 보자. 신문사 사주와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확대하기를 원하는 상원의원이 압력을 행사하고 나간 편집국장 방에서 로렌은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노예무역(slave trade)”이라며 보류한 기사를 내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편집국장은 완고하다. 진실(truth)보다는 기업의 책임(corporate responsibility)이 더 중요하다는 기묘한 논리를 내세우다가 결국 세상이 원하는 뉴스는 (진실이 아니라) “자유무역ㆍ세계화ㆍ엔터테인먼트 같은 것”이라며 “이것이 우리의 찬란한 미래(glorious future)”라고 소리를 지른다. 편집국장이 윤전기 앞에서 로렌과 통화하는 앞서의 장면을 포함해 약간 억지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언론의 진실(truth)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real”하다.


결국 특정하게 발굴된 진실보다는 종국에 어떤 것이 현실을 구성하는가가 이 세계의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진실이 되고, 현실은 구성된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최상위 현실은 자본이다. 로렌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이익으로 수렴된다.(Everything is about bottomline.)”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현실이고 영화에선 (어쩌면 현실과는 판이하게!) 현실이 진실 발굴의 계기가 된다. 다양한 층위의 현실을 의미와 가치의 필터로 걸러내 작은 쪼가리일망정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을 나바 감독은 영화적 현실로 제안한다. 이때 영화적 현실과 현실의 현실 간의 차이 혹은 일치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적 현실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만이 영화 속 조지 모건 편집국장의 말투를 빌리면 영화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칼 슈미트는 일찍이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이 대중이 스스로 예외상태를 만들어 주권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면, <1987>이 취급하는 근본 문제가 주권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영화는 인물의 정치를 다루게 된다. 반면 영화 <보더타운>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주권(권력)의 유예와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는 인물의 탈(脫)정치로 소묘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상의 구도는 역설적으로 반대 결과를 초래한다. 즉 현실을 장악한 자본에게서 현실을 쟁취하려는 <보더타운> 극중 인물의 ‘보잘것없는’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 되는 반면, 주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1987>은 확고한 진실의 휘장을 내거는 바람에 정치가 소멸하고 관객이든 출연자이든 눈물 흘리는 수동적 인간만을 남긴다. 


<보더타운>은 “The following is inspired by true events.”라는 말로 시작해 “실종되고 살해당한 후아레스의 여성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후아레스의 빈민촌을 원경으로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잡으며 시작하고, 조립을 마친 대형 TV 완제품이 컨베이어에서 휙 하고 나와 아마도 출하를 위해 위쪽 라인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과 곧 바로 살해당해 암매장당한 여성 시신의 발을 근경으로 보여주며 끝난다. ‘#me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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