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으로 간 현대인, 그들이 외치는 서글픈 구조신호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

by 안치용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


영화를 접하며 관객은 레이첼 맥아담스의 투박한 행태와 딜런 오브라이언의 말끔한 슈트 차림에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앙숙이며 이질적인 남녀가 무인도에 표류한다는 설정을 알고 영화를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인도라는 극한 상황이 남녀의 앙숙 관계를 녹여내고, 결국 '투닥거리다 정드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수순을 밟을 것이란 예상을 하게 한다.


샘 레이미 감독은 관객이 이 안락한 로맨스의 소파에 몸을 누이려는 찰나에 영화 속 비행기 추락 사고인 양 그 소파를 거칠게 빼내 버린다. 와이파이로 상징되는 문명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섬이 어쩌면 로맨스의 무대가 될 법도 하건만, 영화는 억눌린 분노가 광기로 분출되는 서바이벌의 장으로 끌고 간다. 역동적인 카메라와 기괴한 선율은 이 급격한 장르적 전회를 감각적으로 몰아붙이며 관객을 예측 불허의 무인도의 난장으로 초대한다.


린다가 증명한 색다른 '성공'의 역설


이 영화를 '루저 여성의 성공기'로 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만이지만, 찾자고 들면 그 속에 담긴 함의가 꽤 묵직하다. 린다(레이첼 맥아담스)의 '서바이벌 생존 스킬'은 회사 동료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자 사회성 부족의 증거로 간주된다. 하지만 섬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이 비주류 취미는 유일한 '기축 통화'가 된다. 여기서 미셸 푸코의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라는 통찰.


“권력이란 획득하거나 탈취하거나 분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붙잡아 두거나 놓쳐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셀 수 없이 많은 지점에서 행사되며, 불평등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관계들의 놀이(혹은 場) 속에서 작동한다.”(<성의 역사> 중)
"Le pouvoir n'est pas quelque chose qui s'acquiert, s'arrache ou se partage, quelque chose qu'on garde ou qu'on laisse échapper ; le pouvoir s'exerce à partir de points innombrables, et dans le jeu de relations inégalitaires et mobiles."
06 (2).jpg

린다가 기존 질서를 찬탈하며 섬을 장악하는 서사는 지식이라는 도구가 어떻게 권력이라는 무기로 변모하는지를 우화로 보여준다. 현대 조직의 능력주의가 지닌 기만을 폭로하는 이 설정은, 일상의 톱니바퀴인 직장인에게 압도적인 전략적 전율을 선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동시에 린다의 변모는 존재론적 은유로 확장된다. 인간 본연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문명의 필터 아래서 은폐되었다가 적시적소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린다가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를 '길들이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상사를 골탕 먹이는 재미를 넘어, 타인의 평가와 직급이라는 라벨에 의해 거세되었던 자신의 주체성과 힘을 야생의 감각으로 회복하는 과정이다. 문명 속에서 '착한 직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한 현대인의 자화상인 동시에, 사슬을 끊어낸 단독자의 해방감이기도 하다.


권력의 속성에 관한 풍자


영화는 단 두 인물을 통해 섬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실험장으로 바꾼다. 브래들리의 파멸은 권력의 주인이 바뀔 때 그 기반이 실제로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는 풍자다. 계급이라는 인위적 보호막이 사라진 현장에서 그의 권위는 실체가 없는 제도적 후광이었음이 드러난다. 린다가 보여주는 가학성은 권력이 이동할 뿐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명징한 진실 또한 드러낸다.


권력이 이동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명징한 진실 또한 드러낸다. 피지배자가 지배의 위치에 섰을 때 혐오하던 폭력을 답습하는 과정은, 린다 자신이 새로운 괴물적 주체로 재탄생하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소묘다.


린다가 거머쥔 칼날은 브래들리를 향한 복수이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이 권력이라는 괴물에 잠식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이미 감독은 의미를 재미로 바꿔서 가볍게 처리한다.

t_po.jpg


<슬픔의 삼각형>의 전복된 피라미드와 그 이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대화 상대이다. <슬픔의 삼각형>의 등장인물들이 보톡스로 '슬픔의 삼각형(미간 주름)'을 지우며 부조리한 문명 속에 안주하려 했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의 린다는 야생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주름을 분노의 에너지로 치환한다. <슬픔의 삼각형>의 마지막에서, 해변의 캡틴이 된 청소부 애비게일은 야야와 함께 산을 오르다 호화 리조트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한다. 그 순간이 영화의 완벽한 반전의 계기가 된다. 문명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보이지 않는 존재인 청소부로 전락할 애비게일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돌을 들어 야야를 살해하려 한다. 그리고 남자친구 칼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듯 숲을 미친 듯이 헤치며 달려간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여기서 더 나아간 파격적인 변주를 예고한다. 애비게일의 선택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우발적인 폭력이었다면, 린다는 자신의 지위를 상실할지도 모르는 구조(救助)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는 린다가 문명의 ‘엘리베이터’를 보고도 모른 척 지나칠 가능성, 혹은 브래들리를 영원히 자신의 '섬'에 가두기 위해 더 치밀한 함정을 파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레이미 감독의 장르적 광기는 이 지점에서 폭발해야 한다. 린다가 발견한 것이 리조트가 아니라 또 다른 기괴한 생존 게임의 시작일 수도 있고, 브래들리를 구원하는 척하며 그를 사회적으로 영원히 매장할 완벽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슬픔의 삼각형>이 인간의 위선을 관조적으로 폭로했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그 전복의 상태를 끝까지 밀어붙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뒤에 남는 순수한 광기의 여러 갈래를 탐구한다. 열린 결말인 <슬픔의 삼각형>과 달리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닫힌 결말을 선보인다. 그런 결말이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와 별개로 그 결말은 광기를 납득할 만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호모 사케르'와 'SEND HELP'


이 영화에서 가장 심오한 지점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개념을 현대 노동 환경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법질서에서 배제되어 누구든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었던 이 저주받은 존재는, 오늘날 거대 기업의 부품으로 전락해 언제든 대체 가능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린다는 회사에서 이미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한 호모 사케르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무인도라는 예외 상태가 발생하자,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브래들리가 거꾸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한다. 전복이 통쾌하긴 하지만 호모 사케르는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만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전언이 통렬하다.

10.jpg

영화 원제인 ‘SEND HELP’는 이 대목에서 중의성을 드러낸다. 단순히 도움을 보내달라는 '행위'의 묘사를 넘어, 모래사장에 거대하게 새겨진 '구조 신호(문구)' 그 자체로서 기능한다. 이 짧고 강렬한 문구는 누구의 시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무시당하던 린다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던 구조 요청이었다가, 야생의 여왕이 된 린다 아래서 무너져가는 브래들리에게 절박한 생존의 신호가 된다. 가장 문제적 해석은, 이 문구를 외부를 향한 요청이 아니라 이 뒤틀린 지배 유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제물(Help)을 보내달라는 린다의 광기 어린 초대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구조되어야 할 것은 섬에 갇힌 육체가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의 일그러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껍질을 깨고 나온 서바이벌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우리 삶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린다가 거머쥔 성공은 달콤하지만, 그 끝에 남은 것은 또 다른 지배와 종속의 굴레이기도 하다. 레이미 감독은 이 뒤틀린 상상력을 통해,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출근하는 현대인에게 가장 잔혹하면서도 짜릿한 판타지를 줄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지도 모른다. “내 '슬픔의 삼각형'을 지워줄 진짜 구조 신호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자신이 정말로 구조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안치용 영화평론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완벽한 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