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리고 도망가 주세요.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만의 것입니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나오는 극중 연극 대사. 마담 보바리의 도망의 열망은 소설 속에서 성취되지 못한다. 소설뿐 아니라, 인생사가 대체로 그렇다.
저 대사의 핵심은 ‘나’이다. ‘당신’은 주체가 아니다. “from” 혹은 “to”와 관련될 뿐, ‘당신의 것’ 임을 선언한 주어조차 ‘나’이다. 그런 ‘나’는 ‘당신의 것’이 되어도 종국에는 ‘당신’ 너머로 도망치게 된다.
‘당신’ 너머에서 만나게 될 것은 결국은 ‘나’인 걸, 부질없는 질주는 소설에서 파멸로 귀결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그렇게 극적인 전개는 좀처럼 드물고 설혹 그런 전개가 예상된다 하여도 우리에게 ‘너의 것’이 되어 도망가는 상상(像想)과 기도(企圖)가 금지되지 않는다. 그 상상과 기도의 시점에서 도망은 단지 ‘너’에 도달하여 ‘너의 것’이 되는 것이며 그 너머는 애써 상정되지 않아야 한다.
산책 중에 산책길과 숲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경계 목을 보았는데, 비비추로 보이는 식물의 새로 돋아난 잎들이 굳이 경계 목 밑을 통과하여 산책길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산책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기 싫어서 문밖에서 뒤를 돌아보는 나의 개 스콜이나 비비추나, 어쩌면 보바리 부인까지 비슷한 열망의 동지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