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 Apr 04. 2024

인제에서 로잉머신을 팔면 생기는 일

당근마켓에서 로잉머신 팔기

당근앱을 처음 사용한 건 재작년 가을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당근, 당근해도 나는 쓸 일이 없었다. 원래가 새 물건이든 헌 물건이든 물건을 사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배드민턴 선생님이신 A가 체육관 사무실에서 저녁 먹을 때 음식을 데워먹을 전자레인지가 필요한데 어디 남는 것 없냐고 해서 찾아보겠다고 한 날 처음으로 당근에 가입했다. 인제에서는 마땅한 게 없어서 주말에 원주에 가서 전자레인지를 키워드로 등록하고 알림을 받으니 저녁 먹는 내내 알림이 왔다. 여러 대 중 3만 원에 나온 전자레인지가 마음에 들었다.


 B에게 문자로 배드민턴 선생님께 식사 대접해 드린다 생각하고 15,000원씩 내서 전자레인지 하나 사드리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그래서 사려고 연락했더니 그 사이에 팔렸다고 했다. 다음날 만원에 올라온 것이 있어서 사려고 남편과 함께 판매자를 만나러 간 곳은 중고 물품 판매장이었다. 당근앱에서 본 만 원짜리는 너무 낡아서 깨끗해 보이는 빨간색 전자레인지를 3만 원에 구입하고 매장을 더 둘러보다 로잉머신을 발견했다.


같이 배드민턴을 배우는 B가 근육을 키우기 위해 로잉머신을 사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말했기 때문에 눈에 포착된 것이다. 바로 '로잉머신 5만 원짜리가 있는데 사장님이 4만 원에 해준대'하며 B에게 전화를 했고, 남편이 시멘트 바닥에서 로잉머신을 직접 시연하는 동영상을 보내서 B가 샀다. 오래된 것이지만 남편이 손잡이도 새로 사서 끼우고, 계기판에 배터리도 넣고, 뻑뻑한 연결부위에 기름칠도 하고, 군데군데 보이는 녹도 녹 제거용 크림으로 닦아내니 제법 쓸만해 보였다.


인제로 싣고 와서 B가 사는 4층까지 남편이 직접 배달해 줬다. 내 배드민턴 파트너 근육 키우라고. 근육 키워서 배드민턴 더 잘 치라고. 그랬는데. 가끔씩 로잉머신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었을 때 '집이 좁은데 로잉머신이 생각보다 크더라, 거실 벽에 세워져 있다, 그래도 몇 번은 해봤다'는 답이 돌아왔다.


올해 2월에 발령이 나서 이사를 하게 된 B가 그 로잉머신을 내게 넘겼다. 쓰든지 버리든지 팔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거다. 베란다 보일러실 앞에 세워진 로잉머신 사진을 한 장 찍어서 4만원에 당근에 올렸다. 올린 지 하룻만에 바로 연락이 왔다. 차가 프라이드라 작아서 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여 차에 안 실리면 남편차로 실어다 주겠다고 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받았다. 오후 2,3시 사이에 가지러 오겠다고 해서 생각보다 쉽게 팔리네, 생각했다. 그런데 한 시간 뒤 다시 문자가 왔다.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살 것 같다고.


거래가 무산됐다는 소식을 들은 B가 보일러실 앞에 세워진 로잉머신 사진을 보고 누가 사겠냐고 하여 처음 샀을 때 원주집 거실에 펴 놓고 찍은 사진으로 교체했다. 그 후 한 달 반 동안 아무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오늘 퇴근 후, 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다가 잠시 쉴 때 문자가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판매되엇나요"

"구매원함니다"


OO고래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의 문자였다. 아이디와 아이디 옆에 설악동이라 적힌 것으로 보아 속초에 사는 여자분 일 거라 추측했다. 8시쯤 가지러 온다기에,


"4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같이 들고 내려가야 될 것 같은데, 저 혼자 한번 들어보고 들 수 있으면 1층까지 갖고 내려갈게요"하고 관사 주소를 알려줬다. 직거래를 할 때는 누구나 찾기 쉽고 안전한 공공장소가 좋다는 당근앱의 친절한 안내가 떴지만 저 크고 무거운 것을 혼자 차에 싣고 공공장소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로잉머신 사이사이 먼지를 닦았다. 그동안 정들었나, 보낸다고 생각하니 괜히 아쉬워서 사진도 찍었다. 그 사이 둘째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로잉머신이 팔렸다니까 '그걸 누가 사'라고 했다. 로잉머신이 안 팔린다고 했을 때, 인제 사람들이 로잉머신을 잘 모르나 보다, 원주에 가면 인구가 많으니까 잘 팔릴 거다, 원주 갈 때까지 그냥 엄마가 운동해라, 했던 딸. 설악동이라 적힌 것으로 봐서 속초에서 사러 오는 것 같다고 했더니 속초에서 인제로 왔다가는 기름값이 더 들겠다고 했다. 이곳 인제의 당근마켓에는 속초, 양양, 고성, 양구의 물건까지 올라온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작년 가을, 처음 당근마켓에서 자전거를 팔 때 모르는 사람을 현관 앞까지 오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딸들에게 들었던지라 어떻게든 혼자 들고 내려가고 싶었다. 8시가 되기 전에 현관으로 로잉머신을 들고갔다. 몇 분 후 까만색 SUV가 들어오고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아이디만 보고 여자분일 거라 추측했던 OO고래님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분이었다. 머리에는 까만 비니 모자를 쓰고 까만 바지에 까만 점퍼를 입고 있었다.


까만 밤, 까만 차에서 까만 위아래 옷을 입고 까만 비니 모자를 쓴 흰머리의 남자분이 차에서 내리며 "가지러 올라가야 되나요?" 하길래 "아니요, 제가 여기 갖다 놨어요"하며 현관으로 안내했다. 현관의 센서등이 안 켜졌다. 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복도의 센서등이 켜져서 조금 밝아졌다.


"이거 설명서는 없나요?" 라고 해서 "설명서 없이도 할 수 있어요"하며 벽에 세워뒀던 로잉머신을 현관에 폈다. 작동법을 말로 설명해 줘도 됐건만. 로잉머신을 펴자마자 나는 로잉머신 의자에 앉아 그 좁고 어두운 현관에서 손이 벽에 닿지 않게 애쓰며 노를 저으며 말했다. "이게 제일 약한 1단인데, 이게 수동이라 더 세게 하고 싶으면 이걸 위로 올리면 돼요"하며 설명했더니 남자분이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내가 로잉머신에서 내리자마자 로잉머신을 번쩍 들고 차로 걸어갔다. 보통은 계좌번호를 묻고 계좌이체를 한 다음에 물건을 가져가는데. 차로 졸졸 따라갔다. 까만 비니 모자에 까만 바지에 까만 점퍼를 입은 흰머리의 남자분, 차에 로잉머신을 싣고 나서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만원 있으세요?"

"... 네?"

"오만 원 짜리라"

"아, 계좌이체로 해주시면 안 돼요?"

"제가 계좌가 없어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했다. 돈은 안 받았고 물건은 차에 실렸고. 왼쪽 위 이빨이 있어야 할 자리 한 군데가 까만색인 저분을 믿을 수 있을까? 집 갔다 오는 사이에 그냥 가버리면? 그러다,


"아, 네, 제가 집에 가서 만원 가져올게요"하고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계좌가 없는 사람이라면 신용 불량자, 은행 불신자, 자연인, 산악인,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사람...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마침 지갑에 만 원짜리가 있었다. 내려가면서 혹시라도 그 차가 가버리고 없으면 계좌가 없는 삶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그분께 무료나눔한 셈 쳐야지 생각했다.


헉헉 거리며 갔더니 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오만 원을 건넸고 나는 잘 사용하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원주에서 인제로 온 로잉머신은 설악산 어느 깊은 골짜기에 홀로 살 것만 같은 자연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분을 따라 속초로 갔다.


사족)

 아무 설명도 없이 카톡 송금하기로 4만 원을 B에게 보냈다. 아무 것도 모르는 B. 무슨 돈이냐고 물었다. 말하자니 길어서,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해주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걷기는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