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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당근 Jun 25. 2020

작아질 용기

꼬치요리와 「작다」 편

 나는 접히고 작아지는 것들을 사랑한다. 대체로 모양이거나, 모양이 되는 중이다. 


 작게 접힌 가게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친구 ‘웅’의 소개로 알게 된 동네의 어느 꼬치요리 전문점이었다. 인적 드문 청과일 시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갈 때마다 손님이 없이 늘 한산했다. 메뉴는 오로지 단출한 꼬치 몇 종 뿐. 사이드로 구비된 토마토 설탕 절임 정도를 제외하곤, 탕이라든가 기타 여분의 안주도 일절 판매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혼술도 꼬치요리도 처음인 주제에 그 집의 꼬치 맛 하나만큼은 절대적으로 좋아했다. 편법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바람직한 정공의 맛이었다. 그 맛에 반해 동행인을 바꿔가며 몇 차례나 더 그 가게를 방문했다. 동행인은 바뀔지언정 꼬치 맛만은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것을 먹는 동안에는 일체의 고유 감각도 불필요했다. 나는 그저 작은 주방의 부속이 되어 달궈지고 꿰어지고 육즙을 머금기 십상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마치 외부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시간관이 가게 내에서만큼은 예외의 양상으로 동작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용기를 내어 “꼬치 요리만 판매하는 이유가 있나요?”하고 물었더니, 무뚝뚝한 사장님은 “여긴 꼬치요리 전문점이니까요.”라고 대답해서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어쩐지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떠오르는 한편으로, 부사의 활용에 대한 사장님의 남다른 취급주의가 느껴졌다. 이 텍스트주의에서 종종 부사 ‘잘’은, 범용적 동사 ‘하다’에 비해 비범한 두각을 드러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식당들은 대체로 목적어의 선택이 부사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주문했던 꼬치는 노릇노릇한 몸체 안에 부드러운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로 빼어 입안에 밀어 넣으며, 내 안에도 그런 소 지점을 확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입구 앞의 바 자리에 앉아 꼬치를 즐기다 보면, 이따금 가게 문을 열고 기웃거리는 손님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게의 입지 여건 상, 아무래도 일을 끝낸 시장의 어르신들이 방문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수용보단 종용을, 존중보단 곤궁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어 매번 부끄러움도 없이 메뉴판을 보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대체로 “아니, 술집에 어묵탕 하나가 없어?”라든지, “이 동네선 이렇게 장사하면 안 돼.”라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가 다였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무뚝뚝한 얼굴로 “저희 가게는 꼬치요리만 판매합니다.”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강짜의 정도가 다소 심한 손님에겐 “나가주세요.”라고 힘주어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가주세요 라니! 강권의 요지가 농후한 권력적인 배웅에 손님들은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허, 참!”을 연발하며 주춤주춤 가게 밖으로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회고하자면, 확실히 대중성이 있는 가게는 아니었던 듯싶다. 사장님에겐 죄송하지만, 대다수의 대중들은 단일 꼬치요리의 판매만을 고집하는 불친절한 가게에 열성적으로 몰려들지 않는다. 열성은 프랜차이즈나 포장마차 쪽에 있다. 그렇지만 그런 고집이 있던 덕분에, 나는 그토록 그 집의 꼬치 맛을 좋아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런 마음은 이따금 듬성듬성 머리를 채우고 앉아있던 극소수의 다른 단골손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마르거나 마르지 않았거나, 키가 크거나 크지 않은 사람들이 술집에 앉아 저마다의 꼬챙이에 꿰인 음식을 느긋이 빼먹었다. 어쩐지 ‘작은 풍경’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곳에서의 우리는 어쩌면 일종의 작은 연대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또 다른 꼬치요리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동네에 새로 생긴 그곳은 척 보기에도 그럴듯한 규모에, 꼬치 외에도 다양한 메뉴들을 판매하고 있어 제법 구미를 당겼다. 이미 꼬치의 세계에 첫발을 들인 나였기에, 호기심을 앞세워 현과 함께 방문했다. 우리는 잔뜩 들떠선 다양하게 먹어볼 요량으로 모둠 꼬치와 돈가스, 떡볶이까지 주문할 정도였다. 현의 포기를 모르는 근면한 식욕이 이 의사주문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내 테이블 가득 차려진 푸짐한 음식들을, 우린 서슴없이 집어먹었다. 


 장장 한 시간여를 소요한 식사는, 과식과 소화불량의 형적만을 남긴 채 어렵사리 끝났다. 식사를 마친 시점에서 느꼈던 소회에 대한 단평이라면, 어쩐지 감흥 없는 맛이었다. 불만족스러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흡족하다 말하기에도 뭔가 부족했다. 부사 ‘잘’보다는 동사 ‘하다’에 주의를 기울인 집들의 특성이었다. 딱히 별 다른 코멘트가 없었던 걸로 보아 그런 생각은 현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굳이 공을 들여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엔 먹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게 하는, 고집 센 꼬치요리 전문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라는 형용사를 마주할 때면 종종, 나는 일전의 그 작고 고집 센 꼬치요리점을 떠올린다. ‘펼쳐짐’을 기질적 숙명으로 받들고 태어난 도화지와 달리, 접히고 작아져야만 유능해지는 존재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장님의 꼬치요리가 그렇고, 이를테면 색종이가 그렇다. 종이접기 아저씨의 말마따나 ‘코딱지’의 마음으로, 각자 보유한 면적과 부피를 하나씩 접어 모양을 도모해야만 한다. 어떤 도모냐 하면, 무수한 실선과 점선의 경유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도모다. 그런 종이접기의 과정을 온전히 수료한 인간만이 비로소 개구리든 학이든 장미로든 결정될 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응축’이라고 부르기에도 하등의 결격사유가 없는, 우리가 시도 가능한 지상에서 가장 모순되고도 발전적인 축소다. 


 작은 것들에게. 램프 월드 에머슨은 말했다. “용기가 모든 사물에 새로운 모양새를 부여한다.” 때로는 단호하게 작아질 용기가 필요하다. 호시탐탐 당신에게 펼쳐짐이나 구김을 행사하려는 무례한 어묵탕 무리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지레 겁을 먹고 확장의 기대치를 수용하려 애쓸 필요 없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럴듯한 외관과 규모와 메뉴를 앞세운 꼬치요리점만으로는 결코 우리 미각을 현혹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끝내 모양을 완성하는 건 단일 메뉴를 고집하는 고약한 꼬치요리점 쪽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알아채기에 그리 대단하거나 어려운 진리가 아니다. 


 과연 사장님의 꼬치요리점이 흥행에 성공했을지, 나는 모른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나도 가게에 발길을 끊어 그 가게와는 소식이 무연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인상으로 자신의 꼬치를 달구고 꿰고 담고 있을 사장님의 정성스러운 몸태만은 눈에 선하다. 아마도 모양이거나, 모양이 되는 중일 테지.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작아질 용기가 필요하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두려워하지 말기를. 우리에겐 접히고 작아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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