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당근 Aug 06. 2020

롤플레잉의 강인함

포션과 서사 편

 자기 전엔 늘 애인인 현과 전화통화를 나눈다. 지난 5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현과 나의 기쁘고 자발적인 일과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우리의 통화내용이란 대단할 건 없어서, 기상과 취침 사이에 일어나는 그날의 자잘하고 너절한 일과들이 대화의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이 별 볼 일 없는 소규모 서사의 등가교환이 결코 질리지 않는 것을 보면, 모든 연인들은 그저 서로에게 대수롭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의 우린 꼭 굶주린 무명작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오로지 이야기의 역량강화를 위해 존재하는 열렬하고 맹목적인 유기체. 통화가 끝난 뒤에는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다. 한 꺼풀 공고해진 사랑과 서사를 각자 몸에 덮고.   


 지난 몇 주간의 통화에서 우리의 가장 큰 화두는 ‘바람의 나라’였다. 얼마 전 출시된 이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에 현이 몹시 몰입해있는 까닭이다. 평소 자신의 무기력함을 그 성정의 근간이자 미덕으로 자랑스레 여겨오던 현은, 근래 들어 최상급의 열정을 아낌없이 게임에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대체 저 신체 어디에 이런 열정을 꼭꼭 숨겨왔던 건가 싶다. 통화 중에 레벨 업, 캐릭터, 레이드, 쩔 같은 게임용어들을 사용하는 일도 부쩍 늘어났다. 그는 내게도 같이 게임에 동참할 것을 수시로 종용해서, 그때마다 나는 “미안. 내가 핸드폰이 없어서.”라든가 “미안. 나는 치킨나라가 더 좋아서.”같은 시답잖은 말로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하고 있다. 단지 게임을 싫어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내가 얼마나 게임에 대한 몰입이 강한 인간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다.


 현에게는 비밀이지만, 고백하건대 나 역시도 한때 롤플레잉 게임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중학생 때다. 그 시절의 우리 집은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폭력이나 학대에 대해 둔감했다. 집안에서 폭력의 최하계층이자 피지배층에 속해있던 나는, 그런 현실에 대해 몹시 참담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 때로 현실의 서사를 벗어날만한, 현실 이상의 비현실이 필요했다. 그걸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게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컴퓨터와 용기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했다. 어떤 용기냐 하면 주인공에 대한 성장을 감수할 용기 말이다. 모든 게임은 1 레벨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엔딩을 보기 위해선 캐릭터의 성장이 필수였다. 모험과 역경을 극복하고 나면 캐릭터도 나도 어김없이 조금은 성장해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서사의 강인함에 대해서.


 당시 내 압도적인 편애를 받았던 게임은 <영웅전설 5>. 정말로 재미있게 플레이했다. 다소 뻔한 제목만큼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롤플레잉의 기본 플레이 구조를 충실히 이행한 게임이었다. 주인공 ‘폴트’가 그의 할아버지 ‘맥베인’, 여자 친구인 ‘우나’, 반려견 ‘쟌’과 함께 음악단을 결성해 세계를 유랑한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주요 골자다. 그 긴 여정에서 그들은 사사롭게는 길 위의 다람쥐를 구조하는가 하면 늙은 음악가의 숙원에 관여하기도, 나아가 궁극에는 세계를 지켜내기까지 한다.


 세계의 평화까지 등장하는 장대한 이 서사 내에서 폴트 일행의 강인함은 필수로 요구되는 덕목이었다. 엔딩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겐 아주 많은 사건과 전투와 고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장을 돕기 위해 게임 곳곳엔 다양한 아이템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용했던 것이 ‘포션’이었다. 상점에 가면 게임 상의 돈을 지불하고 포션을 구입할 수 있었다. 빨간 포션을 먹으면 체력이, 파란색 포션을 먹으면 정신력이 회복됐다. 모든 생명체는 심신의 소모에 몹시 취약하니까, 그야말로 무적의 아이템이라고 부를법했다. 포션의 권능에 힘입어 주인공 일행은 끝내 최종장의 적까지 물리치고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어쩌면 포션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잇템’이라 칭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 시절의 내가 파란색과 빨간색 맛 파워에이드를 물처럼 마시고 다녔다 하더라도, 그리 과장되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아무래도 게임은 예전보다 멀리하게 되었지만, 대신 서사만큼은 근거리 내에서 꾸준히 쌓아오고 있다. 인간은 모두 서사 위에 걸쳐있거나 거칠 테니까, 게임오버가 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제법 나이를 먹은 만큼 자연스레 가정폭력이나 학대를 당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인생의 곤경이나 불우는 끝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멈춰있거나 겨우겨우 나아가기 일쑤다. 이 서사는 세이브 기능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진행해도 왜 이리 수월해지지가 않는 건지, 애초에 난이도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럴 때마다 내가 애호하는 현실의 포션을 찾게 된다. 가령 3월의 수선화, 한여름의 반짝이는 바다, 살며시 다가와 머리를 부비고 가는 고양이, 선물 같은 연말정산, 봄의 푸릇한 나물 요리, 겨울철의 대방어 등. 또 한 가지. 취침 전 현과의 짤막한 전화통화야말로 심신의 소진과 대치되는 내 특효의 회복 포션이다. 


 어제의 현은 내가 전화를 걸자마자 “나 뒤져, 뒤져!”라며 황급히 통화를 끊었다.(사냥 중에는 대개 캐릭터가 죽을 위험이 있다며 통화불가 상태다.) 잠시 벙쪘지만 금세 다시 전화가 걸려 와서 기분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현은 어제도 역시나 내게 같이 ‘바람의 나라’를 하자고 계속 졸라대서, 그 어마어마한 집요함에 항복한 내가 “그럼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데?”라고 어쩔 수 없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은 들뜬 목소리로 내가 먼저 ‘초보자’ 단계를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 초보자는 퀘스트와 사냥을 완수해나가며 레벨 업을 해나가야 한다고도. 그렇게 주어진 모든 과정들을 진행해 나가다 보면 금세 자기 같은 ‘고렙’이 될 수 있다나 뭐라나.


 “고렙이 되면 뭐 하는데?”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하긴 뭘 해. 그냥 누가 덤비면 존나 다 때려잡는 거지.”

 현의 말을 들은 나는 그것 참 대단한데, 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닥 게임에 동참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서사는 정말로 강해지게 한다, 우리를. 어떤 역경이 덤벼도 존나 다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잠시 인용하자면 박연준 시인의 말마따나,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길 위에서 몬스터를 만나게 될 수도, 체력과 정신의 강제적인 소진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포션이 있는 이상 우리는 회복을 거듭하며 경험치와 어빌리티와 레벨의 상승을 이뤄낼 터였다. 그렇게 단단한 용기를 내어 초보자에서 고렙의 과정으로 기꺼이 나아갈 터였다.  


 이 서사와 용기가 건재한 이상, 우리의 롤플레잉은 분명 이견 없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전 08화 겉바속촉의 슬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인간성 식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다른 SNS로 가입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