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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당근 Sep 03. 2020

김밥의 가정

김밥과 인지 부조화 편.

 김밥을 먹을 때는 시각에 집중하게 된다. 김밥 내면의 다양한 생김새를 살피기 위해서다. 나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러기엔 김밥이야말로 적격의 음식이다. 작은 원형의 몸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다. 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성실하고 유효한 내면의 근간들에 대하여. 정숙한 김 아래 밥알, 오이, 우엉, 당근, 맛살, 계란부침, 단무지 등이 생생히 도사리고 있다. 나는 돌돌 말려 일체화된 그것을 한입에 쏙 넣을 수도, 꼭꼭 씹어 삼켜 몸에 체화시킬 수도 있다. 결코 독자적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존재의 유기성이다.

      

 한편 김밥의 특정 일면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재료의 질량감에 대해 민감한 인지 능력을 소유한 이들이다. 친구인 ‘라’의 편식은 김밥 앞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애초에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는 준 채식주의자인 데다, 비 육류 중에서도 오이를 못 먹는 식성의 소유자기 때문이다. 특유의 냄새 때문이라나. 라의 공적 사유와 사적 편증이 극치로 양립하고 있는 음식이 다름 아닌 바로 김밥이다.


 그런 그와 함께 맞은 어느 다음날의 아침이었다. 전날 우리가 소주를 마셨던가, 칵테일을 마셨던가. 둘 다였던가. 만취한 라는 밤새 코를 골며 내 침대 위에 커다랗게 자빠져있었다. 폭력적인 햇살이 우리 골과 이마를 실컷 두드려대고 나서야 겨우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해장이 필요했다. 닥쳐올 숙취에 맞서 우리가 취해야 할 최우선적 선결 과제였고, 마침 집 근처에 이용하기 적당한 분식점이 있었다. 전면이 유리로 된 가게 도어를 열고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오로지 선전만이 유일의 목적으로 보이는 음식 포스터가 가게 벽 여기저기에 붙어있었다. 미적 감각에 대한 고려라곤 일말의 여지도 없었음이 매우 분명해 보였다.


 김밥이란 전방위적 음식이다. 재료의 첨가를 통해 얼마든지 정체성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다. 참치가 들어가면 참치김밥, 치즈가 들어가면 치즈김밥, 마약이 들어가면 마약김밥… 아니, 마지막은 못 들은 걸로 하자. 아무튼 각자 소신과 취향을 전방위적으로 반영해 메뉴를 주문했다. 육류 섭취를 지양하는 라는 야채김밥을, 나는 치즈김밥을 주문했다. 장국은 서비스. 라는 여느 때와 같이 음식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로 순식간에 김밥 세 줄을 먹어치웠다. 참기름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뽐내며 돌연 그가 나에게 말했다. 김밥에서 골라낸 오이가 접시 위에 수북했다.


 “나는 사실 위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는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인가 싶으면서도 내색 않고 잠자코 있었다. 아침을 그가 계산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먹느라 다망한 입을 제외한, 나머지 눈과 귀로 이야기를 들었다. 라의 사연인즉슨 이랬다.

     

 시린 칼바람이 살 표면을 에는 계절. 인사고과 시즌이었다. 비정규직 육체노동자인 그는 서울 종로구 소재 모 대학병원의 주차관리 부처에서 6년째 근무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특성인지 육체노동자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보면 몹시 열악한 처우의 근무지다. 그곳에서 일을 하기 위해선 복리나 복지보다, 노고와 인내 같은 단어들과 먼저 친해져야만 한다. 불합리한 급여와 하루 2교대로 돌아가는 과중한 근무 사이클을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채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희귀한 예외에 있는 모범적인 경우가 바로 라였다. 어떤 특정한 극한의 상황에서, 한 인간의 근면함과 성실성은 도리어 빛을 발하기도 하는 법이다. 현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각종 클레임과 사고들도 라의 근면성실 앞에선 선뜻 힘을 잃었다. 직장의 모두가 입을 모아 라를 상찬했다. 이대로라면 차기 인사고과에서 라의 승진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인생에서의 수많은 시각적 추정들은 결코 예측불허의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정작 승진을 하게 된 건 라보다 한 기수 아래의 모 후배였다. 라의 승진은 누락됐다. 승진의 추월차선을 탄 그 후배에 대해, 라는 “가진 능력이라곤 팀장 똥꼬 빠는 것밖에 없는 새끼”라는 박한 평가를 내놨다. 실제로 인사권자인 팀장과 해당 모 후배가 여러 차례 접대 술자리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나돈다는 걸로 보아, 라의 욕설 섞인 비평은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어 보인다.      


 라가 자신의 위선을 눈치채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그가 말한 ‘위선’의 정체가, 다름 아닌 보편의 인간들에게 두루 통용되는 인지 부조화 상태라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모른다. 한 인간의 안팎에 존립하고 있는 다양한 자아의 일면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에 라가 내세웠던 남다른 근면 성실함에는 전혀 훼손이 없다. 그와 별개로, 라는 자기 내면에 불쑥 자라난 나약과 박약, 불만과 불안, 시기와 이기들을 목격한다. 행여 누구에게 들킬 새라 둥글게 돌돌 말아 안쪽에 꾹꾹 감추어둔다. 그 순간의 라는 자신이 아주 많은 모순과 불균형으로 이루어진 인간처럼 느껴진다.      


 극히 화자 중심적인 이 일련의 서사를 듣는 동안, 나는 아주 많은 라의 모습들을 상상한다. 비정규직 육체노동자인 라, 준 채식주의자인 라, 정의로운 라, 주정뱅이 라, 대식가인 라, 근면 성실한 라, 부정한 그들에의 욕설에 인색함이 없는 라,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는 라. 모두 라를 구성하고 있는 소규모 쓸모 있는 근간들이다. 인간은 일면만으로 사회화와 개인화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기에, 아주 여러 개의 면면들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비롯되는 숙명적인 괴리감 속에서, 기어이 자신의 부조화를 발견해내는 라의 결백한 인간성을 나는 본다. 자신의 김밥에서 집요하게 오이를 골라내는 라의 모습과 직결되는 지점이 아주 없지만은 않다. 여느 보편 다수 화자들의 모습이다.


 라로 대변되는 수많은 영혼들의 구제를 위해, 우리가 가진 조력의 형용과 배분을 주저해선 안 된다. 아인슈타인을 가정한다. 혈통적 국가적 기질적으로 일평생 다양한 자아의 학습과 체득을 꾀했던 그다. 아마도 삶을 사는 동안 내면에서 잃어가는 것들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비극이라고 힘주어 말할 것이다. 동시대로 돌아와 김태호 PD를 가정한다. 그는 효과적인 부캐의 확보와 확충이야말로 한 프로그램(인간)의 완벽한 흥행을 담보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유산슬과 유두래곤, 지미 유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재석 씨의 실례를 근거로 제시할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근거리로 범주를 좁혀, 눈앞에 놓인 김밥을 가정한다. 매일 글을 쓰는 요즘엔 나는 자주 김밥이 된다. 총 열아홉 개의 자음과 스물한 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김밥이다. 그 제재들의 적절한 영합을 통해 고유한 나만의 글쓰기를 취득할 수도, 혹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명료한 사실이라면, 선결적인 영합 없이는 어떤 글자도 완성이 불가능하다는 불변의 진리다. 김과 밥알만으로는 결코 그럴듯한 김밥을 만들 수 없듯 말이다. 김밥이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설령 특정한 자모음이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덜컥 그것의 배재를 시도했다간, 결국 우리에게 가능한 글자의 수효는 점점 유실되게 된다. 그러므로 아마 김밥은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네 안의 오이, 우엉, 당근, 맛살, 계란부침, 단무지를 좀 더 인정하고 사랑해주어도 좋다고.


 나는 가만히 라를 응시한다. 아인슈타인은 죽었고 김태호 PD와는 무연하다. 김밥은 입이 없고 이 담화의 유일한 청자는 나뿐이니, 그에게 나눠줄 적절한 언어를 내가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했다. 이런 난처한 순간에는 차라리 인간의 유일 수단이 텍스트뿐이었으면 싶다. 언어는 사실에의 왜곡에 무척 취약하니까, 텍스트로 전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조심스레 라에게 말했다.


 “나 치즈김밥 한 줄만 더 시켜도 돼?”


 라는 내게 꺼지라 했고, 나는 격조 있게 고맙다고 말한 뒤에 치즈김밥을 한 줄 더 주문했다. 그걸 본 라도 서둘러 야채김밥 두 줄을 추가로 주문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여느 다음날의 아침에 커다란 남자와 작다란 남자가 마주 앉아 각자의 김밥을 먹는다. 오이가 없는 야채김밥과 오이가 있는 치즈김밥으로 이루어진 상반된 조합의 조찬이다. 라와는 달리 냄새나는 오이도 주저 없이 먹는다. 보다 충만한 자아의 완성으로 가는, 이 세계의 아주 사소한 섭취라고 믿고 싶다. 얼마나 먹어야 부조화 아닌 조화로운 인지를 인지하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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