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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Aug 09. 2024

매일 교회에 출근하는 거지들

자기만 아는 이기심

Intro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 보면 거지를 자주 보게 된다. 왜냐하면, 거지들이 손쉽게 털어먹을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거지에게 교회를 개방했더니

처음에 사역했던 교회는 청량리에 있었는데, 거지들에게 교회를 개방했었다. 거지들이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안 쓰러웠던 교회가 거지들에게 교회를 개방했다. 화장실이라도 쓰라는 거다. 그리고 세면대 밖에 없어 시설이 열악하지만 얼굴이라도 닦으라는 거다. 대신 주일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예배가 있으니 주중에만 개방을 허용했다. (뭐, 교회도 생존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사람들이 없어지면 교회 자체가 사라지니 말이다.)


그런데 청량리에 거지가 오죽 많은가? 무수히 많은 거지들이 교회에 찾아왔다. 그런데 거지가 찾아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ㄱ. 교회에서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한다. ㄴ. 교회의 물건들이 망가지거나 없어지기 시작한다.


거지들에게 교회 입장을 허용하자마자 교회가 난장판이 되었다. 화장실은 쓰지 못할 수준이 되었고, 휴지를 비롯한 화장실 비품과 교회 예배당 내의 값비싼 물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일에도 거지들이 찾아와서는 소동을 일으켜서 예배에도 큰 지장을 초래했다. 주일에는 방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자, 교회가 이래도 되냐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고, 새로운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다시는 안 오고, 그리고 (워낙 훔쳐가는 게 많아서) 재정적으로 힘들어진 교회는 거지들의 출입을 막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지들이 욕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말이자. 호의를 권리로 알기 시작한 거다.




호의가 권리가 될 때

나는 이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낙타와 천막>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게 된다. 아라비아 사람이 여행하던 중에 사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낙타가 사막의 밤이 너무 춥다며, 코만이라도 넣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낙타가 불쌍해서 들어주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낙타가 주인을 쫓아내고 천막을 차지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호의를 권리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다"는 말이 너무 웃기다. 누군가는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지출이 나가고 있는데 "교회가 사랑이 없네"라며 호의를 당연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모습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애초에 호의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을 위해서 교회가 "일시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한다고 해보자. 예산 문제로 제공하는 걸 그만두었을 때 시민들의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까지 해줘서 고맙다"보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소리지르는 거다. 애초에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으면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그런데 베풀다가 그치면 호의를 권리로 알고 욕하기 시작한다.


거지에게 한 번 돈을 주기 시작하면, 호구가 많은 교회라고 낙인 찍힌다. 거지에게 적선을 하면, 그 다음 주에도 거지는 찾아온다. 처음 한 번 돈을 주면 거지는 빼먹을 게 있는 교회라며 계속 찾아온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지 않으면 그 이후로는 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한 번 주다가 안 준다면..? 사랑이 없는 교회라며 따지기 시작하고 버팅기기 시작한다. 호의를 베풀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며 비난하고 화내는 모습을 볼 때면 화가 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매주 교회를 찾아오는 거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


매주 찾아오는 거지

내가 사당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에도 매주 찾아오는 거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거지에 대한 교역자들의 반응이 매서웠다. 배은망덕한 인간을 보는 시선이었다. 그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거지는 매주 교회에 찾아왔다. 그것도 예배 시간이 가까울 때에만 찾아왔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다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무튼 가장 바쁠 때 거지가 찾아오곤 했다. 주일 예배 전만큼 사역자들이 바쁠 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때마다 부교역자가 자기 사비로 거지들에게 돈을 주었다. 특히 한 번도 빠짐없이 매주 주일 출근하는 이 거지에게도 계속 사비로 돈을 주었다. 10년 전이었지만, 당시에도 거지들은 천 원은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보통 5000원에서 만 원 정도를 적선하곤 했다. 그렇게 매주 주었으니, 이 거지에게만도 1년(52주)이면 수십만 원이다.


그런데 그날은 수중에 돈이 없었다. 평소에는 이 거지를 생각해서 미리 돈을 준비해 놓지만, 그게 의무도 아니고 항상 그렇게 신경써서 준비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자기에게는 자기 일이 있는데, 선의(하고 싶은 일)을 위해 의무(해야 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날에는 행사도 있어서 바쁘기도 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음에 오라고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수십만 원을 받아낸 거지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사랑이 없냐고 말이다.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모습이 사역자는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아니, 자기가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마란 말인가.


거지보다 가난한 사역자들

거지들에게는 놀랍게도. 사역자는 돈이 많지 않다. 겉으로는 정장을 입어서 말끔하지만, 돈이 많지 않은 직업이다. 부교역자들의 연봉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나 개척교회의 부교역자들은 더욱 열악하다. 4대보험도 안 되며, 보너스도 없는데 그 교회 목사들의 80%가 한 달에 100만원 조금 넘는 사례를 받았다. 전임 부목사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대략 200만 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오죽하면 코로나 이후 대량의 사역자들이 쿠팡으로 빠져나갔을까. 택배는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며 환경이 열악하다고 계속 기사에 나는데, 사역자들은 해보니까 이게 훨씬 낫다는 거다. 그래서 요즘 각 교회들마다 부교역자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없는 돈에, 의무도 아니지만 매주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줬더니만, 돈 안 준다고 사랑이 없다고 쏘아붙이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기부와 적선은 의무가 아니라 호의이다. 그런데 당당하게, 당연히 줘야 할 것처럼 나올 때 주는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이 거지에게는 돈을 주지 말자고 사역자들이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


체면을 포기하는 이들

거지들 중에는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왜 그런가 여러 번 생각해보기도 하고, 인터넷을 잘 찾아보기도 하고, 책을 읽어보기로 하고 그랬다. 거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체면을 포기한 거라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거지가 무엇인지 이해를 해보아야 하는데, 거지란 자기가 일할 것을 포기하고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된 사람도 존재하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튼, 거지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영업사원이나 마케팅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서 (재화를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받아내기 위해 체면을 무릅쓰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업사원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거지는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어쩌다 껌과 같은 걸 팔더라도 올바른 시세에 맞춰서 파는 게 아니라 동정심에 기대어 돈을 받아낸다. 즉, 돈을 구걸하기 위해서는 체면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거지임을 당당히 보이기 위해서는 더러워야 한다. 머리도 떡지도 냄새도 나야 사람들이 진짜 거지라고 생각한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불쾌해 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체면을 포기할 수 있어야 성공적인 거지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예배 시간에 찾아오는 이유

이것은 돈을 구걸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주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너는 돈을 줘야 한다"는 걸 어필할 수 있으려면 웬만한 철면피로는 쉽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게 이기심이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지들은 왜 굳이 예배 시간에 찾아오는 걸까? 특히나 예배 직전 교역자실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 예배 시간에 교역자실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웬만하면 교역자는 돈을 주고라고 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가장 불리하고 바쁜 시간에 돈을 뜯어먹기 위한 철저한 전략의 기술이다. 교역자라 (예배 준비 등의 이유로) 예배 시간에 늦을 수는 없으니, 얼른 돈을 주고라고 쫓아보내게 만들려는 심산인 것이다.


예배 직전에 목양실에 찾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는 예배 전이 가장 민감하고 분주한 시간이다. 그래서 설교 전에 설교자와 대화를 하거나 설교 준비를 방해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설교 전은 가장 중요하고 바쁘고 귀중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에 목양실에 방문해서 목사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바쁜데 잡상인과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지 않은가. 훼방하지 말라고 돈 주고 쫓아보내게 하는 것이다.


거지들 중에 가게에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해서 식사 시간이 지나고 찾아오는 거지들이 있다. 반면, 가게 운영 시간에 찾아오는 거지들이 있다. 거지가 들어오면 손님들이 들어오려다가도 나가기 때문에 "빨리 돈 주고 내보내게 하려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피해를 안 보려면 얼른 돈 주고 내보내는 게 나을 거라는 협박을 해오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대신 나를 위한 이기심만 가득한 것이다.




내 입장만 중요한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거지들은 자기 입장을 강요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다가는 뜯어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거지가 찾아왔는데, 이것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거 같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넘어지시며 뇌출혈이 생기는 바람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그래서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했다. 나는 벨기에에서 유학중이었고, 시험기간에 논문 디펜스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급하게 왔는데, 부모님은 모두 병원에 계시는지라 현금이 하나도 없이 카드로 생활해야 했다. 게다가 설교자가 없어서 설교까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주일 오전 10시 20분쯤. 교역자실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기에 설교 원고 마무리를 하다가 잠깐 문을 열어주었다. 그랬더니 거지가 한 사람 와 있었다. 그리고는 돈을 달라는 거다.


현금도 없고, 목양실도 아버지 방이라 내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줄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교회가 은혜가 없고 사랑이 없다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여긴 내 방도 아니고, 담임 목사님이 입원중이셔서 임시로 설교를 하러 왔다고 하니, 돈을 안 주니 하나님이 벌 주신 거라는 막말을 내뱉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완벽히 패륜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거지들의 상당수가 다 이러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은혜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는 거지들은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적용


은혜인가 권리인가

그런데 간혹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이 거지와 같을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다는 듯이 구하고 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고 나를 구원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신학적으로도 물론 문제가 있긴 하다. (구원에 대한 이 브런치의 이전 글을 읽어보자.) 이건 마치, (원래는 니가 나에게 돈을 주러 왔어야 하는데) 내가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으니, 당연히 돈을 내라는 거지의 자세가 뭐가 다른가?


많은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이와 비슷하다.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을 당연하게 요구한다. (물론 비기독교인들 중에 비논리적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다.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베풀라는 거다. 상대방의 입장은 무시하고 내 입장만 이야기하는데 웃기는 소리이다. 이건 마치, 대한민국 국민이 영국 여왕에게 가서는, "니가 자비로운 영국의 여왕이라면 나에게 돈을 달라"와 무슨 차이인가?)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믿음을 주겠으니, 당연히 은혜를 달라고 요구하는 행태를 보인다.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모습이 위의 거지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의 자세에 대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라고 말한다. 사실 그렇다. 당연히 요구할 걸 요구한다는 저런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멸시한다. 나는 이렇게 성실한데, 이 교회에 다니는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 썩어빠졌냐며 교회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은 사실 복음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더 자세한 사항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 브런치의 이전 글들을 살펴보자.)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그에 대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온 사람의 모습이 더 의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자세가 교회를 만든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자기 의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겠는가.




한나의 기도


그리고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보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래의 링크를 확인하면 좀더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단하게만 살펴보면 이렇다.


한나는 자기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와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니, 하나님의 필요를 보게 된다. 하나님도 나와 같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자식"이 없었다는 거다.



우리의 기도도 한나의 기도와 같아야 한다. 기도가 저 위의 거지나 바리새인처럼 "내 요구"와 "내 입장"을 관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대화이지, 철면피처럼 내 의견만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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