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대단한 단편영화제>에 단편 경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15회를 맞이한 <대단한 단편영화제>에 이번에 '키노라이츠상'이 추가되었다. 영화 별점과 리뷰를 기록하는 앱인 '키노라이츠'에서 영화제 후원을 하고 있어서, 이번엔 키노라이츠 인증회원들 대상으로 10명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해 키노라이츠상 심사를 하도록 했고, 나는 운이 좋게도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요새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들 중 수준 이하의 작품성이나 재미를 보여 실망한 것들도 있는데, 본선에 진출한 단편영화들을 보니 한국 영화의 미래는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품된 600여 편 중 예선을 거쳐 올라온 25개의 단편경쟁작들은 전반적으로 감독들의 개성이 뚜렷했다. 하지만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는 수준차이가 많이 났는데, 내가 아무래도 영상작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녹음할 때 불필요한 노이즈가 크게 들리진 않았는지, 공간 울림이 너무 심해 대사 전달력에 문제가 있진 않는지, 배경 음악과 대사간에 볼륨 조절은 잘 되었는지, 컷과 컷의 연결지점이나 편집이 깔끔하게 되었는지, 의도한 느낌을 잘 전달하는 연출인지 의도치 않게 전달된 연출인지, 연기의 디렉션이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인지, 로케이션이나 의상, 미술이 적절하게 들어갔는지 등이다. 어떤 영화는 단지 시나리오의 '있어 보임'에만 신경 쓰고 전반적인 영화의 완성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반면, 어떤 영화는 영화적인 완성도는 높지만 메시지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험적인 연출이나 학생다운 풋풋함이 살아있기도 했고, 바로 상업영화감독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 높은 영화도 있었다. 단편영화는 상업 장편영화와 달라서, 단편영화에서 두각을 드러내도 상업영화로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 같은 영화들을 보고 싶다면, 홍대 상상마당에서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대단한 단편영화제>를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잠복근무의 맛> 김지홍 감독
잠복근무를 하며 맛없는 편의점 음식을 먹는 두 형사가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잠복근무용 식사를 할까에 대한 이야기다. 울 정도로 맛없는 빵을 먹고, 그들에게 주어진 편의점이라는 재료 아래 어떻게든 맛있게 먹어보려 고군분투한다. 잠복근무는 극단적으로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이다. 감독은 그곳에서 상상과 재미를 더해 소소한 기쁨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려고 했다. 재미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흑백으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컬러로 연출한 의도는 좋았으나, 흑백에서 조명 연출이 좀 아쉬웠다. 지루함을 연출하려다 자칫 영화가 지루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편의점은 관객들도 너무 친숙하게 자주 가는 곳이므로 굉장히 기발하고 생각지도 못한 음식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다.
<더 다이버스> 조희수 감독
강남 한복판에 횡단보도를 지나 흰 선을 그어 타원으로 트랙을 만들고, 올림픽 마크가 뜨며 릴레이 경기가 시작된다. 인파를 옭아맨 선에서 주인이 되어 달리는 인물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매여있지 말고 주인이 되는 시점을 그렸다. 하지만 완성도가 낮아 전달력이 부족했다. 처음 라인기의 시점으로 선이 그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사실 너무 흔들리는 데다 장면이 너무 길어 힘들었다. 스테디캠을 써서 흔들리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또한 달리는 선수들 말고 주변 인물들은 사전에 합의된 게 없는 일반 군중들이었는데, 그렇기에 두 선수들의 달리기는 행위예술처럼 보였지만 거꾸로 의도가 잘 전해지지 않고 굉장히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달리는 동안 선수들을 전혀 쳐다보지 않거나, 군중이 그들을 보고 과하게 놀란다거나, 트랙 선이 그어질 때 트랙 선을 전혀 밟지 못한다거나 하는 소소한 연출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또한 트랙에서 시작해서 트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흰 선의 트랙이 사무실의 책상 위나 코로나 체크 온도계, 코로나 검사소, 혹은 마스크나 사람 한가운데에도 그려져 밟고 넘어가는 것 같은 마지막 다운 마지막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정인혁 감독
항상 좋지 않은 연애를 하던 주인공은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문제로 관심병사처럼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술김에 초록색 빛이 나던 친구와 잠을 자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답답해하다가 가슴이 정말 터질 것만 같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뻔하고 유치한 로맨스지만, 대담하고 귀여운 상상력을 갖추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보이는 연출들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리듬감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엮어내는 연출력이다. 티키타카를 하는 대사들은 빠른 편집이었지만 집중이 잘 되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SF적인 요소들도 핍진성이 충분하다고 느껴지게 연출이 잘 되었다. 모두를 처치하고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유치한가? 글쎄,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니까.
<사랑의 알러지> 육상필 감독
원반 던지기를 하는 남자와 여자. 둘은 대화 속에 마음을 감추고 있다. 최대한 다른 주변 상황들은 배제한 채, 오로지 둘의 섬세한 대사와 연기로 승부하는 작품이다. 마치 여느 공중파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잘라다 놓은 것처럼 완성도가 있다. 둘의 마음을 조금씩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긴장과 달달함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화면을 넓게 썼는데, 원반 던지기를 하듯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았다가 멀어졌다 하는 연출과 잘 맞아떨어졌다.
<임종> 고은주 감독
남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둘은 제주도로 내려간다. 하지만 할머니는 글도 못쓰고 읽지도 못하는 분. 강제로 다른 사람이 쓴 유서에 지장을 찍어봤지만 효과가 없다. 자식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만을 기다린다. 굉장히 단순하고 소박한 이야기고, 로케이션도 일반 제주의 시골 가정집이지만 분위기만 느껴도 제주도라는 것이 전해질 정도로 색감과 분위기를 잘 잡았다. 그리고 감독의 디렉션이 훌륭했는지, 제주어로 연기하는 나이 든 연기자들인데도 연기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또한 집안 어른이 돌아가실 때 그 재산을 놓고 싸움을 본 적이 있는 관객들이라면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질 이야기와 연출이 좋았다. 짧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서도, '할머니가 전해주는 사탕'처럼 굉장히 영화적인 연출이 들어가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는 것이 완성도를 더 높였다.
<소녀> 이기홍 감독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소녀가 집안에 있을 때, 의문의 남자가 문을 열어보라며 다그치고 자꾸 침입하려 한다. 관객을 섬뜩하게 만드는 연출과 연기는 정말 신인 감독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퀴엠>처럼 광기의 마음속을 대변하는 중얼거림 소리, 빛 등을 섬세하게 잘 섞어놓았다. 연기뿐 아니라 중간중간 짧게 등장하는 분장에서도 감탄하게 되었는데, 그 의문의 남자를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 그 문을 함부로 열어도 되는 것일까.
<모래> 김상규 감독
취준생인 주인공은 면접 후 지친 마음으로 허름한 옛날 목욕탕에 들어간다. 이제 곧 끝날 시간인 그곳에서, 그는 같이 면접을 보던 사내와 만나게 된다. 둘의 경쟁은 목욕탕 사우나에서도 이어진다. 사우나에서 오래 버틴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것은 사우나에 있던 모래시계 속의 모래들처럼, 비좁은 구멍으로 서로 떨어지려 애쓰는 허망한 경쟁이다. 모래시계 속 모래들은 어차피 서로를 이기고 떨어져 봤자 다시 뒤집어져 경쟁적으로 떨어진다. 의미 없는 그들의 땀과 경쟁은 괜한 모래시계의 뒤집힘 속에 서로를 찌르고 있다. 대사가 거의 없는 무성영화에 가까운데, 지루하지 않고 긴장감을 주는 연출력이 탁월하다. 또한 좁고 허름한 공간인 데다 흑백으로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도나 조명을 짜임새 있게 다뤘다. 전체적인 완성도가 좋은 작품.
<봉인해제> 조우 감독
일진에게 왕따를 당했던 소녀의 복수. 일진이었던 아이는 금수저에 예쁘게 생겨서 인스타에서도 인싸 중의 인싸다. 그녀는 저주를 내리려 한다. 저주에 필요한 물건을 위해 일진이었던 아이의 집에 침입하려고 계획한다. 굉장히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소하고 귀엽게 연출되는 부분들이 웃픈 현실을 풍자한다. 다만 코믹한 부분은 더 코믹하게, 서늘한 부분은 더 서늘하게 그렸으면 좋지 않았을까. 감정의 폭이 작은 느낌이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느낌이 조금 들었다. 일진과 다시 마주한 부분에서 연출은 좀 더 서로 광기가 드러났으면, 끝없이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더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귀마개> 박도훈 감독
난청을 이유로 일을 그만두게 된 포크레인 운전사인 주인공. 퇴직하라는 사장의 권유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후배를 가르친다. 나이가 든다는 것,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나이다. 변한 것 없는 일상인데 모두가 변해버린 것 같은 담담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너무 담담해서 크게 와닿지는 않은 작품.
<급처합니다...네고 불가> 박현웅 감독
당근으로 기타 5개를 한꺼번에 내놓았는데 누가 한 번에 다 사겠다고 해서 나간 주인공. 길 건너편에서 롱테이크로 찍은 연출은 대사와 호흡의 긴장만으로 지루하지 않은 재미를 준다. 13분 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화면 속에서 열정과 꿈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현실을 보게 된다. 돈이 많은 구매자는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가난해서 음악을 그만둬야 하는 주인공이 보기에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 낸 착취와 다름이 없다. 친절을 가장한 웃음 뒤에 담긴 멸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를 착취하며 살고 있다. 시나리오와 연출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영화.
<X의 저주> 김희수 감독
연인이 헤어지는 과정을 코믹하게 담아냈다. 대사나 연출의 세련됨이 돋보이고, 편집의 리듬감이 좋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을 끌고 갈 줄 안다. 오래되어 회전 기능이 고장 난 선풍기는 오래된 연인과도 같다. 처음 살 때는 회전하며 서로를 반복해서 바라보던 물건이었지만, 이젠 어느 한쪽밖에는 보지 못한다. 사랑은 식고, 이기적이 되어버린 관계는 이리저리 때려 고치려고 해 봐도 일시적일 뿐이다. 물건이 다하면 버릴 때가 온다. X는 영화를 보면 중의적으로 읽히는데, 그렇게 소소한 곳들에 해석할 장치들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이 맞물릴 때 주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특히 마지막 주인공의 편지는 이것이 왜 그런 저주의 소재를 다루었는지 알게 해 준다.
<안경> 김경래 감독
남자는 헤어진 예전 연인에게 빌려줬던 테니스 라켓을 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 라켓은 이미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에게 빌려줘서 없었다. 오래된 테니스 라켓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사랑은 그렇게 버려지고 굴러다닌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물건들이 가진 의미가 변할 때, 더 이상 예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영화는 그런 연인의 마음을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으로 지켜본다. 마치 둘만의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더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벽이 느껴진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그들만이 안다. 하지만 서로의 작은 물건들은 그 일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즐거운 나의 단식원> 남규리 감독
단식원에서도 왕따인 주인공은, 어느 날 탈출하고 싶어 하는 한 친구를 만나 탈출계획을 세운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이 하루하루 살고 있던 주인공에게도 바라는 것이 생긴다. 이 영화는 많이 아쉬웠다. 중간중간 충분히 재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지 않아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소리 부분에서 배경음악과 대사의 볼륨조절이 잘 안 되었고, 공간음향이 대사에 너무 많이 녹음되어 영화 내내 노이즈가 심하게 들어있었다. 또 문을 여는 소리나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너무 심하게 볼륨이 높았다. 아마 따로 소리를 녹음하거나 하지 않고 현장에서 녹음한 질이 좋지 않은 소리를 그대로 쓴 모양이다. 이런 부분에서 완성도가 낮으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이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쿠키영상이 있었는데, 사족이라고 느꼈다.
<부엉이 셈치기> 김태훈 감독
부엉이 셈치기라는 말은 무엇을 세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관계나 애정, 역할들은 모호하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누가 역할을 더 잘하고 있는가? 그러는 중에 주인공은 삶의 한켠에서 둥글게 웅크린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없는 일상들일 뿐이지만, 중년 여성인 주인공의 마음은 일터와 집의 관계에서 자리를 둘 곳이 없다. 부엉이 셈치기 처럼 셈할 곳이 없다. 담담하고 조용한 이야기 속에 눈을 떼지 못하는 연출력과 연기가 돋보인다.
<금사빠> 정승훈 감독
별 것 아닌 이유로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 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고, 남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 코미디 로맨스에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뻔해 보이기도 한 여주인공의 매력과, 그걸 받아주고 있는 남주의 케미가 돋보인다. 독특한 캐릭터를 관객에게 잘 이해시킨 작품이다. 이런 사랑과 저런 사랑이 공존하는 지점. 너무 심각하지 않게 접근해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중에 주연들의 좋은 연기가 어느새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소년유랑> 이루리 감독
한날한시에 태어난 두 학생은 서로 방황을 하고, 칼리 언니라는 존재에 의해 조금씩 성장해 간다. 결국에 그 과정에서 그들은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의지하던 것에서 의지가 되는 존재로,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니까. 마치 하나의 필름카메라 같은 감성을 가진 작품이다. 전체적인 영상의 완성도도 뛰어나고, 미장센도 훌륭하다. 화면 하나, 연기하나 버릴 것이 없을 정도다. 마치 시와 같은 영화의 흐름은 어떤 이에겐 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작품일수록 공감을 하면 더욱 깊이 젖게 마련이다.
<sub)구독과 조아영#일상> 김국희 감독
일상 브이로그 유튜버를 하고 싶은 조아영은 카메라를 켜고 연습한다.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일상은 무엇하나 구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 없어 보이지만, 평범함 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폭력 또한 그들의 삶이다. 순수하고 평범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마지막 주인공의 다급한 마음에 갑작스레 확 긴장감이 올라오는, 연출력이 훌륭하다. 주인공 역의 실제 이름도 조아영이라는 게 재미있고, 그 옆의 친구로 출연하는 배우가 이 영화의 감독인 점도 재미있다. 친구가 영화 속에서도 '이런 걸 찍어보라'며 조언을 하니까.
<빈 터의 배우> 전종대 감독
사진작가 전종대는 모델을 섭외해 자신의 작품을 찍는다. 배우와 교감하며 사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배우는 그 감성에 어느새 몰입해 사진 속에 작가의 감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는 감독인 전종대 사진작가가 실제로 열었던 '빈 터의 배우'사진전에서 같이 상영했던 단편영화다. 감독인 전종대는 본인 전종대를 연기했다. 자신의 사진전에 자신의 철학을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사작가답게 별 것 아닌 풍경과 모델에서도, 순간적으로 몰입해 감성을 잡아내는 연출이 좋다.
<가장 보통의 하루> 김주연 감독
시각 장애인인 주인공과, 하반신 마비인 지체장애인 주인공 둘의 지구상에서의 마지막을 그린 영화.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는 SF적인 설정에서 두 여인의 마음과 긴장이 달달하게 전해진다. 로맨스에서 중요한 것이 배우가 가진 매력인데, 두 배우 모두 사랑에 빠질만한 충분한 매력을 드러냈다.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에서 두 장애인이 가장 하고 싶은 것들은 비장애인들이 너무나 평범하게 보통의 일상으로 지나치는 것들이기도 하다. 가장 보통의 것들을 즐기는 하루, 그것이 그 둘에겐 가장 특별한 것들이니까. 저예산 단편영화에서는 연출로만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아 자칫 SF적인 설정이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설득력 있게 연출을 잘 해냈다. 특히 엔딩 시퀀스는 마치 한 편의 CF를 보듯 아름다웠다.
<무릉> 서원태 감독
구제역으로 살처분이 이뤄질 어느 대학의 농장. 학생들은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한 송아지를 탈출시키려 한다. 도축이 얼마나 인간과 떨어져 있는지, 어떻게 도축의 대상화와 소비재화가 일어나는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는 작품. 도축이 인간과 멀어진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백정들이 도축을 담당하면서, 양반들은 도축을 눈에 안 보이게 멀리 떨어트려놓고 싶어 하고 천하게 여겼다. 그리고 도축의 결과물인 고기만을 소비했다. 무릉은 이상향을 이야기한다. 현실에서 인간은 무릉을 만들기 위해, 지저분한 것들은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있다. 결말이 조금 아쉽지만, 전달 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이다.
<나니까 미에루!> 장재우 감독
여고생의 오컬트 서클에서는 한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친구를 괴롭히며 그녀를 이용해 의식을 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 괴롭힘의 이유는 단지 그녀가 '쪽발이'라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던 중 '나니까 미에루'라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한 의식을 알게 되고, 그거에 '쪽발이' 친구를 이용하려고 한다. 오컬트적인 미술과 연출이 꽤나 디테일하고 세심해 공포를 자아낸다. 관객에게 공포를 주는 지점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고 전달한다. 이 영화를 보다가 의문이 들었는데, 이 오컬트 동아리는 '일본 주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하고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 온 아이라고 혐오하며 놀리는 모습은, 우리의 혐오범죄 현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인간은 가장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그것을 혐오하는 방식으로 애착을 드러낸다. 인셀들이 여성혐오범죄를 하는 것처럼.
<당신의 사과나무> 김재현 감독
CG가 난무하는 요새 애니메이션계에, 이렇게 손으로 한 땀 한 땀 그린 애니메이션은 독특한 느낌을 전해준다. 여자는 도망치고 있고 칼이 그 뒤를 쫓는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날 길은 없다. 그 와중에 그녀가 뿌린 작은 씨앗은 계속 자라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녀가 없어도 숲을 이룬다. 벗어날 수 없는 절망에서도 누군가 뿌린 것들은 언젠가는 싹을 틔울 것이다. 절망 속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작품.
<정옥> 유지민 감독
정옥은 폐경을 맞게 돼 생리대가 필요 없어지고, 당근으로 생리대를 팔게 된다. 그중에 한 소녀를 만나고, 정옥과 소녀는 서로의 모습을 본다. 누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다. 익숙해진 것들과 안녕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일상적인 이야기에 일상적이고 소소한 연출이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높아 어느새 정옥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왜 그렇게 중년 부부가 등산을 다니는지 어쩐지 알 것 같다.
<쎄이 썸띵> 오지인 감독
미국 한인교회에 어쩌다가 가게 된 소녀. 영어도 못하고 방언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로맨틱 코미디. 방언기도가 정말 허언인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녀에게 그건 그 나름대로의 터진 방언이다. 방언이 터진 소녀와 그녀가 좋아하는 미국인 교인이 주고받는 마지막 표정 연출이 일품이다.
<터치> 유승헌 감독
칭찬고래라는 카페에서 일하는 주인공. 자존감이 떨어진 고객들을 위해, 무엇이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나 터치하는 것은 절대 금지. 이런 상담을 이용해서 고객과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고객이었던 여성은 사적인 질문을 해오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연출이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깔끔하지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당황스러운 작품. 나는 그렇게 들어오지 말라는 벽을 마음대로 깨고 들어오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공감은 많이 못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가는 과정이 좋은 꽤 수준이 높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