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연구 대상자를 위한 의자는 꽤나 편안해 보이는 1인용 소파였다. 의자의 사용감을 보아하니, 재호가 처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재호에게 남 박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의식이 일반적인 상태와 다른 증상은 많이 있지. 심각한 수준의 치매, 광우병, 우울증, 조증 삽화 등….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내가 원하던 방향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 내가 세운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뇌가 아니었던 거지. 나는 조현병이 ‘의식’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네. 현대의학은 조현병을 일으키는 기전과 완화하는 방법 등은 알아냈지만,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지. 유전, 스트레스, 약물 등…. 나는 그게 분자단위에서부터 일어난 구조적 변이가 의식에 영향을 준 거라고 생각하네. 또 이 의식에 대한 연구가, 조현병의 발병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네. 그럼 예방도 할 수 있겠지.
자네는 조현병 환자 중에서도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고, 특별한 마약과 최면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흔치 않은 결과를 보여줄 것 같았어. 또 그냥 초기나 말기의 환자가 아니라, 환각을 일으킬 정도로 조현병이 진행되었다가, 다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이 된 상태의 뇌가 있어야 했네. 무엇보다, 자네는 과학을 좋아하고 공부했었기 때문에 실험 도중 질의응답이나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때, 최대한 과학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파악해서 설명해 줄 수 있을 테지. 그게 자네를 선택한 이유야. 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일반 조현병 환자를 이렇게 인가가 나지 않은 실험에 임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게 불법이기도 하고. 그래서, 지인인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재호는 남 박사가 솔직하게, ‘자네의 뇌가 필요해.’라고 말해준 게 오히려 나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치료해 주겠다고 둘러대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었고, 재호도 생활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성공하면 내 복제 의식이 컴퓨터에 나타나는 걸 보겠지? 그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죠?”
남 박사는 활짝 웃으며 헬멧처럼 생긴 것을 가져왔다. 헬멧에는 무수한 전극이 붙어있었고, 격자 모양으로 연결된 그물이 머리에 닿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쓰고, 내가 준비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 되네. 질문에 답하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할 거야. 그 기본 데이터가 완성되면 기존의 연구 데이터랑 비교해서, 내가 만든 ‘의식 복제 장치’에 들어가면 되네. 저기서 자의식과 기억을 그대로 복제해, 내가 만든 인공 시냅스를 배열하게 될 거야. 그러면 거기에서 자네의 의식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하면 되지.”
“잠깐만요.”
재호가 심각한 얼굴로 손을 들자, 남 박사가 당황했다. 재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머리를 깎아야 하나요?”
“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머리는 안 깎아도 돼. 그 헬멧에는 내가 고안한 강력한 증폭기가 있어서, 머리를 깎지 않아도 돼. 오히려 머리를 깎으면 너무 전기가 올라서, 통증이 생겨 데이터가 오염될 지도 몰라.”
“하핫,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연구 기간은요?”
“나는 1년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용은 매달 말에 보내주겠네. 실험 한 번에 10만 원씩, 1주일에 3번. 그럼 한 달이면 120만 원이지. 어때,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자, 그럼 여기에 사인을 하게.”
남 박사는 연구자와 피시험 대상에 대한 계약서를 가져왔다. 비인가 실험이긴 하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라고 했다. 재호는 처음이라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뭐가 됐든 재호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들자, 기구 위 안쪽에 무언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은 뭔가요?”
남 박사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거. 내가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문구인데, 뇌 연구를 하면서 항상 기억에 남는 말이었어. 그래서 피실험자들이 두렵지 말라고 써놓은 문장이야. 자네도 실험을 하다가 두려워지면, 저 문구를 기억하게.”
“흐음…. 이게 두려움을 줄여주는 문구라니 잘 모르겠지만…. 네 알겠어요.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요?”
“자, 그럼 이걸 쓰고, 이렇게…. 좋아, 됐어. 저기 저 불이 들어오면 머리에 잘 씌워진 거지. 그럼, 질문을 시작하겠네….”
재호가 남 박사의 연구에 참여하는 시간은 한 번에 약 3-4시간 정도였다. 그렇게 남박사의 연구실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요새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재호는 남 박사와의 일을 현주에게 이야기했다. 현주는 조금 걱정했지만, 알아서 잘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재호는 자신과 남 박사의 관계가 영화 <백 투 더 퓨쳐>에 나오는 주인공과 박사 같다고 현주에게 말했다. 그러다 정말 대단한 발견을 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어느덧 3주가 지났다. 그날따라 남 박사는 들뜬 모습으로 재호에게 말했다.
“아, 아, 재호 군, 오늘은 드디어 1차로 ‘의식 복제 장치’를 할 때가 되었네. 자, 시작해 볼까?”
“넵! 한번 해보죠.”
“하하하! 좋아. 그럼 옆방으로 갈까?”
옆방 철문을 열자 거기엔 또 계단이 있었다. 나선으로 된 그 계단은 직접 만든 것 같이 울퉁불퉁했다. 3층 정도 깊이를 더 내려가자, 납으로 된 문이 나왔다. 남 박사는 그 문을 열쇠로 열고 불을 켰다. 그 안에는 머리를 넣는 거대한 장치가 있었고, 그 주위를 직경 2~3미터는 되는 원반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서버용 컴퓨터가 수십 개 연결되어 있었다.
“자 여기에 누우면 되네. 만일에 대비해서 몸을 고정하도록 되어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MRI와 비슷한 원리니까 움직이면 곤란하거든.”
“이 장치를 직접 만드신 건가요? 연세도 많으신데 어떻게….”
“괜찮아. 교수에겐 다 방법이 있다네. 대학원생이 있지 않은가. 하하핫!”
남 박사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자, 유난히 영화에 나오는 악당처럼 보였다. 재호도 웃으며 장치에 들어가 누웠다. 남 박사는 밴드로 팔과 다리, 몸통, 머리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원반을 가리켰다.
“저 원반은 작은 중입자 가속기일세. 의료용으로 쓰이는 것을 내가 개조한 것이지. 그것으로 자네의 뇌에 필요한 부분을 자극해서, 데이터를 추출해 낼 걸세.”
“음…? 중입자 가속기라고요? 그럼 제 머리에 감마선 같은 게 들어오나요? 방사능은요?”
남 박사는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들어오지. 괜찮아. 통증이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방사능에 피폭되는 거잖아요! 저 괜찮은 거 맞아요?”
“하하하, 자네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이건 헐크나 캡틴 아메리카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이건 원래 암 치료용으로 만들어진 거야. 탄소 원자를 정확히 원하는 암세포에 갖다 꽂고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치료기지. 주변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고 방사능 걱정도 X레이 촬영보다도 적어서 요새 많이 쓰는 의료기기야. 그리고 내가 쓰는 건 기존보다 에너지를 훨씬 줄여서, 다른 여타 세포에 손상을 주는 게 아니니까 뇌를 파괴하진 않을 거야. 이건 자네 뇌 시냅스에 있는 단백질 분자들의 배열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분자단위에서부터 의식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의료용으로 쓰인다니 괜찮다 싶었지만, 굉장히 찝찝했다. 다른 데는 몰라도 머리에 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그걸로 무슨 데이터를 추출하고 어떻게 복제한다는 것인지 재호의 지식으론 알 수가 없었다.
“자, 시작하네.”
남 박사가 버튼을 누르자, 굉음이 들리며 무언가 계속해서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그 기계는 재호의 머리를 삼킬 듯이 내려왔다. 재호는 상반신이 삼켜진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마치 거대한 동물에 삼켜진 느낌이 들었다. 소음에 귀가 찢어지는 듯했다.
한 시간 뒤, 실험이 끝나고 재호는 기계에서 꺼내졌다. 머리에서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소음을 계속 들어서인지 심하게 피로했다. 남 박사는 수건을 건네며 등을 토닥였다.
“땀을 좀 닦고, 오늘은 돌아가도 괜찮네. 난 인공두뇌로 옮겨진 데이터를 A.I.로 보정하고 시냅스를 배열시켜야 하네. chatGPT를 써 보니, 대학원생은 필요 없겠더라고. 무서웠지? 수고했네.”
재호는 일어나 땀을 닦으며, 괜히 겁먹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건물 밖에 나오니, 오히려 머리가 더 상쾌해진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흠 글쎄, 아마 지하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 것이겠지.
며칠 후, 재호는 남 박사에게서 1차 실험이 실패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어차피 몇 번이나 실험에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남 박사는 1년은 걸릴 거라고 얘기한 터였다. 재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남 박사의 연구소로 찾아갔다. 벨을 눌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재호는 이제 연구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 문을 열고 연구실로 내려갔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술병 여러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았다. 항상 재호가 앉아 있던 1인용 소파를 보니, 남 박사가 앉아서 졸고 있었다.
“박사님, 에이, 술 한잔하셨군요? 괜찮아요. 또 해보면 되죠.”
남 박사는 재호를 보지도 않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 틀렸어…. 처음…. 열어야….”
“네? 뭐라구요? 박사님~ 여기서 주무시지 말고, 저쪽 소파로 가셔서 주무세요~”
“음… 음? 아, 재호 군…. 자네… 미안하네. 내가 일어… 일어나지.”
잠에서 깬 것 같은 남 박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재호는 남 박사를 부축했다. 술에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재호가 썼던 헬멧에 전극이 뜯겨 나뒹굴고 있었다. 남 박사가 상심이 큰 것 같았다. 재호는 남 박사를 소파에 앉히고, 헬멧을 주으러 갔다. 재호는 헬멧을 들고 뜯어진 전극을 붙여보려고 이리 저리 만지며 말했다.
“에이~ 남 박사님! 과학 연구가 한 번에 성공하는 게 어디 있어요. 몇 번이나 실험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한 데이터가 연구하는 데 또 도움이 되고. 그런 게 연구잖아요. 안 그래요?”
웃으며 뒤를 돌아본 재호의 시야에 남 박사가 보이지 않았다. 목뒤가 뜨끔했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 박사가 보였다. 남 박사가 반대쪽에서 주사기를 재호의 목뒤에 꽂은 것이다. 재호에게 남 박사의 눈이 보였다. 남 박사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취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재호의 몸에 힘이 빠져갔다.
“바… 박사님…?”
남 박사는 호흡기를 재빠르게 재호에게 씌웠다. 재호의 시야는 흐릿해지나 싶더니, 바로 정신을 잃었다.
재호는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이 정신이 들기도 전부터 신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재호의 머리는 뜨겁고 아팠다. 무슨 일이지? 손으로 만져보려 했으나 손이 의자에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었다. 여기는 한참이나 지하에 있던, 개조한 중입자 가속기의 의자였다. 말을 해보려 했으나 입에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재호가 몸부림치며 소리를 내자, 연구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남 박사가 일어나 다가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거울이었다. 남 박사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며 걸어왔다.
“어제의 데이터는 사실 실패한 게 아니었어. 절반의 성공이었지. 하지만 그 데이터로 알게 되었어. 역시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의식’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수십 년, 아니 평생 동안 이 연구를 하고 싶었고 준비해 왔는데, 정작 연구 데이터를 보니 단절된 경계가 내 실험을 막고 있지 뭔가? 그 경계는 내 데이터를 계속해서 오염시키고 있었네. 바로 눈앞에 성과가 있는데…. 수십 년 연구의 성과가!! 고작 경계가 가로막게 놔둘 수는 없지…. 마코프 블랭킷을 알지? 경계 밖과 안은, 그렇게까지 단절되어 있으면 안 되는 건데. 그러면 안과 밖 둘 다 죽는 거야. 서로 확률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아야 사는 거지.”
재호는 겁먹은 눈으로 숨을 몰아쉬며 남 박사를 쳐다보았다. 남 박사는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꺼내 재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 경계란 것은 바로, 자네의 두개골이야.”
재호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을 뻔했다. 거울을 보니 재호의 이마 위 머리뼈는 이미 깨끗이 잘려 나갔고, 분홍빛의 뇌가 드러나 있었다. 남 박사는 거울을 치우고 PC앞에 가서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래서 자네의 두개골을 제거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기로 했네. 너무 겁먹거나 소리치면 실험에 방해되니까 입을 막은 것뿐이야. 보다시피 가장 아픈 부분은 이제 막 끝났다네. 절단면에는 마취약을 따로 놔뒀으니 몇 시간은 괜찮을 거야. 아, 아, 소리 지르려고 하지 말게. 여기는 핸드폰도 터지지 않고, 아무리 소리 질러봐야 밖에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네. 그래서 이렇게 외딴섬 같은 건물 아래에 연구실을 차린 거지.
자, 지금부터 다시 실험을 계속하자구. 두개골을 연 채로 수집하면, 훨씬 더 오염되지 않은 데이터가 나올 거야. 헬멧도 이미 개조했어. 전극을 바로 뇌에 꽂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래서 전에 쓰던 건 버린 거지. 아~ 가만히 있게. 그러다 몸에 상처가 나면 자네만 고통스러울 거야. 자네는 어차피 사회에서 매장된 사람 아닌가? 아무도 자넬 찾지 않겠지. 하지만 이렇게 위대한 연구의 데이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 사회에 도움도 되고 말이야. 자네는 밖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그리고 내가 말했잖은가, 머리를 자를 필요 없다고. 그냥 열면 되니까.”
이 자는 미쳤다. 아니, 차라리 미친 거였으면 좋겠다. 그의 차분한 표정과 말을 봤을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실패하면 이럴 작정으로 재호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혹시 이 연구실을 만드는 걸 도와준 대학원생들도 자신처럼 된 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재호는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입에 테이프를 붙여 놨는데도 밖으로 그 소리가 들릴 것처럼. 그 몸부림에 묶인 손목과 입에 붙인 테이프 뒤로 피가 흘렀다. 아무도 모르는 이 지하감옥에서, 머리가 열린 채로 언제까지 무슨 고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죽여…. 죽여줘! 재호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남 박사는 재호의 몸부림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이, 모니터를 보며 무언가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가 새로 만든 헬멧을 들고 걸어왔다.
“데이터가 올바르게 나오면, 두개골을 다시 잘 덮어줄 것이니 걱정 말게. 만약 이렇게까지 실험을 했는데도 데이터가 더 나오지 않는다면, 흠…. 자네의 뇌를 다른 방식으로 써 볼 생각이지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헬멧을 씌울 테니 조금만 참게. 걱정 마. 다 잘될 거니까.”
남 박사는 미소 지으며 재호의 벗겨진 뇌의 안쪽에 침이 잔뜩 꼽힌 헬멧을 푹 씌웠다. 그리고 재호를 돌아보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그럼, 질문을 시작하겠네.”
현주는 이주일이 넘도록 재호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재호는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 현주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재호가 겪은 일들도 있기 때문에, 혹시나 안 좋은 마음을 먹진 않을까. 현주는 일을 마치고 재호의 집으로 갔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봐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재호의 마지막 메시지는 남 박사와의 실험 1차를 마치고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거였다. 현주는 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재호는 안 그래도 전과가 있기에, 보호관찰관과 경찰들은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지만 재호는 없었다. 경찰들은 남 박사라는 사람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CCTV와 기지국 정보를 확인해 봤지만, 재호의 흔적은 모란사거리에서 사라졌다. 현주는 남 박사의 연구실이 ‘외로운 교통섬 같은 건물’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 경찰에게 말해줬다. 경찰들은 지도를 확인했다. 정말 그쪽에는 그런 건물이 딱 하나 있었다. 현주와 경찰들은 그 건물로 바로 달려갔다. 하지만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벨을 눌러도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특수장비들을 동원해서 겨우 철문을 뜯어내고서야, 경찰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또 하나의 철문을 뜯어냈다. 경찰들이 테이저건을 들고 들어서자, 방 한쪽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화과자를 먹고 있던 남 박사가 나타났다. 남 박사에게 재호에 대해 묻자, 남 박사는 옆 문을 가리켰다. 경찰은 안쪽 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재호가 거대한 기구에 묶인 채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재호는 두개골이 열려 있었고, 뇌가 사라진 채로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시체가 된 재호의 두 눈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재호를 발견한 경찰은 재호의 시선을 따라가 기구의 안쪽 위를 확인했다. 거기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죽음 직전에는 종과 횡으로 시간이 끝없이 늘어져, 그대는 끝나지 않는 꿈을 꾸며 영원히 살게 되리라.』
-<청록의 시간> 2권,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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