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사랑하여 어둠이 무섭지 않던 날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첫 문장을 패러디하여 쓰자면) 이 영화는 2019년 1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흑백 화면을 연출하여 건조하고 삭막한 1980년대 소련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도 청춘은 명랑하고 쾌활하고 생기가 넘친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등장인물들의 집 벽과 그림, 공책에서는 핑크 플로이드, 티렉스, 블론디, 데이비드 보위, 밥 딜런, 더 클래쉬, 루 리드, 리처드 헬, 에코 앤 더 버니맨, 비틀즈 등 80년대의 록 그룹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들의 음반 재킷을 재현한 분할 화면 장면이나, 토킹헤즈의 싸이코 킬러를 뮤지컬처럼 연출하여 젊은이들의 왕성한 혈기를 드러내는 장면,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나체로 입수하는 장면은 언제나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 준다. 특히 마이크와 친구들이 앨범 커버를 재현하는 장면은 영어 가사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공책으로도 보인다.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땐 공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끔 불완전한 번역이나 오독은 오히려 원곡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서정성을 부여한다.
"소련의 록 뮤지션들은 인류애를 깨닫고 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돼" 라며 가사 검열을 당하고, 팬들이 플랜카드를 들어 올리자마자 저지당하고, 환호성조차 못 지르며 고작 발바닥만으로 박자에 맞추어 탭핑하는 것만이 허용되는 억압적 시대상황 속에서도 젊음은 쉬이 억눌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크게 여운을 주는 이유는 빅토르 최가 자신의 밴드를 꾸려 첫 무대를 하는 장면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진영에 비틀즈가 있다면, 공산주의 진영에는 키노가 있다."는 문장의 그 "키노"임에도 불구하고, "키노"로서의 모습은 영화 후반부에 아주 잠깐 지나갈 뿐이다. 레토는 여타 음악가들의 전기영화들처럼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절정을 향하는 첫걸음에서 영화는 끝난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는 빅토르 최만을 다루는 전기영화라기보다는, 가장 심하게 사상에 짓눌리고 관습에 탄압받던 시절에도 가장 자유롭던 청춘을 그린 영화 같다. 물론 키노의 빅토르 최와, 주파르크의 마이크를 주축으로 서사가 흘러가는 영화이지만, 둘만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그런 시절에도 별을 사랑하여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청춘들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사실 처음에는 빅토르와 마이크는 마치 떠오르는 해와 지는 달 같다고, 그래서 마이크가 빅토르의 무대 중간에 떠나는 장면은 록 씬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인물 간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는 두 사람의 반골 정신이나 솔직함 같은 것에 더 눈길이 간다. 노래에는 시대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마이크와 빅토르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담아내고 내면의 감정을 드러냈다. 빅토르와 마이크는 구속의 시대에 사랑과 자유를 노래한 시대의 목소리였다.
빅토르와 마이크가 가진 개인의 특수성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그들의 무대를 사랑하는 청중들로 인하여 시대의 보편성으로 확대된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이라는 팻말을 든 사내로 인해 상상임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장면들, 예를 들면 마이크의 무대를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추며 즐기는 관중들이나, 버스에서 "적국의 노래를 부른다"며 시비를 거는 어른들을 응징하는 장면은 그 시절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던 자유에의 열망을 드러낸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빅토르 최의 노래는 자유의 송가가 되어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부른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똑같은 노래를 거리로 불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풍화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그의 음악과 그 속에 담긴 정신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덜어주고 힘을 북돋아 줄 위로가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레토를 볼 때마다 그들의 열의에 존경심이 듦과 동시에, 내 가장 매섭고 고된 날들에 부드럽게 흘러들어와 가사와 멜로디로 나를 북돋아 주었던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수많은 밴드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덕분에 이렇게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