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밑바닥과 악수하고, 내 실수를 용서하기. 그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기
트레인스포팅은 내게 있어서는 청춘 하면 바로 생각나는 영화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클럽에서 릿지랑 게일이 서로 남친 얘기하고, 토미랑 스퍼드랑은 서로 여친 얘기하다가 막상 넷이 만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하고 서로에게 물어보면 릿지랑 게일은 "쇼핑!!!!"이라 대답하고, 토미랑 스퍼드는 "축구!!!!;"라고 대답하는 장면!ㅋㅋㅋㅋㅋㅋㅋ방금까지 서로 여친남친에 대한 고민 나누다가 막상 당사자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너무 공감됐다.
그리고 또 이 클럽의 인테리어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밀크바를 모티브로 했다. 클럽에서는 셰필드에서 결성된 뉴웨이브 신시사이저 밴드 Heaven17의 Temptation이 흘러나오는데, 멤버들이 밴드명을 Heaven17로 지은 이유는 시계태엽오렌지에서 언급되는 가상의 그룹 "The Heaven Seventeen"에서 따왔다고 한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클럽의 시태오 콘셉트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 클럽 장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됐다ㅋㅋㅋ
시계태엽오렌지 레퍼런스처럼 처음에 봤을 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보면 볼수록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서 볼 때마다 새롭다. 예를 들면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작가인 어반 웰시가 렌턴에게 좌약식 마약을 주는 마약 딜러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라던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존 호지가 첫 장면에서 가방 들고 렌턴 쫓던 경찰이었다던가 하는 사실들!
렌턴 패거리들이 호텔로 향하며 비틀즈 Abbey Road 앨범 커버를 패러디한 장면도 인상 깊다. 사실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가 세련됐다(물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 장면처럼 지저분한 장면도 많지만ㅋㅋㅋㅋㅋ). 그 세련된 느낌을 극대화해주는 건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딱 맞는 음악의 삽입이라고 생각한다. 첫 장면부터가 이기팝의 Lust for Life가 흘러나오며 주인공 패거리가 물건을 훔치고 도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렌턴이 약 때문에 쇼크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갈 때, 전혀 행복한 상황이 아닌데 루리드의 Perfect day가 흘러나오는 장면도 재밌다. 루리드의 퍼펙트 데이는 레토에서도 마이크가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떠돌아다닐 때 사용되었다. 상황과 노래의 간극이 빚어내는 아이러니는 왠지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블러의 Sing, 펄프의 Mile End 등등 멋진 음악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마약중독자들의 성장영화이지만 이들이 마약을 하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아서 좋다. 물론 가정폭력을 겪었거나, 허무주의자거나 아니면 어떤 저항의 표현으로 마약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불법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위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서 좋았다.
트레인스포팅이 성장영화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처음엔 인생을 선택하지 않겠다던 렌턴이, 마지막에는 인생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하는 수미상관적 구성이다. 친구들과 고향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길을 떠나는 렌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어서 그런가, 내게는 왠지 렌턴의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렌턴이 런던에 마련한 집에 허락도 없이 쳐들어와 내내 시건방지게 굴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던 벡비는, 한 사람 몫을 하는 성인으로 성숙하기 전까지 내내 나를 괴롭히는 나의 못된 습관처럼 느껴졌다. 시상식, 영화, 사업 등 온갖 분야에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며 끊임없이 일을 꾸미는 씩보이는, 치기 어린 자존심과 콧대 높은 허영심 같았다. 이기팝에 푹 빠져있으며 운동을 좋아하던 순애보 토미는, 모든 경험이 첫 경험 일수밖에 없는 청년기에만 느낄 수 있는 설레고 들끓는 열정이라 생각했다. 바보같은 실수를 많이 하면서도 타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던 스퍼드는 순수함 그 자체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벡비는 자아중심성이나 폭력성, 씩 보이는 허영심과 자존심, 토미는 열정, 스퍼드는 순수함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여하튼 "난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전진해 인생을 선택할 것이다. 바로 당신처럼. 직업, 가족, 존나 큰 텔레비전, 세탁기, 자가용, CD, 건강한 몸, 치과 보험, 내 집 마련..(중략)“등 자신감 넘치는 대사에서 드러나듯이, 벡비와 씩보이를 배신하고 떠나는 렌턴의 모습에서는 무거운 짐을 던 것 같은 홀가분함과 앞날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철든 어른의 모습 그 자체다. 벡비와 씩보이는 배신했지만, 스퍼드 몫의 돈은 챙겨두는 렌턴의 모습에서는 청년기에 가지고 있던 순수함은 간직해 두는 것 같았다.
사랑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토미. 그러나 엉망이 된 토미의 집안에서도 좋아하던 이기팝의 포스터는 끝까지 벽에 붙어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렌턴과 식보이가 주고받던 영화와 밴드에 대한 토론들. 그러니까 취향, 영화, 노래, 꿈, 사랑, 장난, 축구. 이런 돈 안 되는 이야기들. 그러나 토미의 죽음과, 식보이와 렌턴 사이의 반목이 상징하듯이 결국 때 묻지 않은 열정들은 사그라진다. 왠지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생각났다.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이던,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 살리라 믿던, 사랑과 아르바이트 같은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하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청춘이 결국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시.
나 역시도 요즘은 좋아하는 것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빈도가 줄었다. 예전에는 맛있는 이국적인 음식 혹은 음료가 있으면 잔뜩 사다가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노래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내가 거의 10년 동안 좋아한 밴드와 그와 비슷한 밴드들의 음악을 카톡 링크로 보내주며 엄청 영업(ㅋㅋㅋ)하기도 하고, 마음속에 깊이 박힌 영화 장면이 있으면 그 장면의 감동을 친구들과 함께 느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혼자 조용히 즐긴다. 억지로 공통분모를 늘리기보다는, 이미 가진 공통분모만을 소재로 대화하는 게 편하다. 사실 원래 내 대화 패턴도 내가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어서 그런가, 해가 가면 갈수록 내 취향을 공유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주식, 영양제, 맛집, 예전에 함께 겪었던 일 등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러다 내 생각조차 납작해지면 어떡하지?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그저 살기 위해 살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벌써부터 젊음의 열정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렌턴이 마약에 중독된 채 친구들과 엉망으로 어울리던 삶을 청산하고 선택한 길은 보통 사람들처럼 사는 평범한 삶이었다. 타성적이고 일상화된 소시민적 삶도 누군가에겐(사실 나에겐) 꿈이 될 수 있다. 성장에 대해 숙고할 수 있었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