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랜드스탠딩'을 읽고
넷플릭스 tv 시리즈 <지니&조지아>의 주인공 지니는 똑똑한 ‘흑인 여성’이다. 드라마는 남자를 따라 혹은 남자를 떠나 미국의 각 주(state)를 돌아다니는 엄마 조지아 덕에 이번엔 매사추세츠의 웰스베리라는 어느 부유한 ‘백인’ 중심 마을에 당도하게 된 지니의 피곤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고등학교에 들어선 첫날, 첫 수업인 ‘심화반’ 영어를 담당하는 백인 남성 교사는 지니에게 ‘너는 어려운 수업을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부담스러우면 언제든 일반 수업으로 옮기렴’이라는 말을 자상한 듯 아닌 듯 건넨다. 그가 준 강의계획서에 올라와 있는 교재 목록은 모두 ‘백인’ ‘남성’ 작가가 쓴 고전들. ‘오늘은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에 대해 쪽지 시험을 볼 예정인데, 읽은 적이 없을 지니 너는 면제’라는 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니는 모두의 이목을 끌며 말을 시작한다. ‘선생님이 나눠 준 교재 목록은 모두 백인 남성 작가의 책이네요. 제가 지적으로 자극받지 못할까 우려돼요. 아서 밀러의 시련은 저도 읽었으니, 시험 칠 수 있습니다(찡긋).’
본인의 인종차별적이고도 성차별적인 면모를 지적당한 교사는 얼굴에 솟아오르는 수치를 분노로 휘감아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너의 그랜드스탠딩을 참아줄 수가 없구나(We don’t tolerate political outbursts and grandstanding).” 그랜드스탠딩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많이 쓰이지 않는 만큼, 넷플릭스 자막은 grandstanding을 그랜드스탠딩이라 번역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 <그랜드스탠딩>이라는 책을 읽은 내게 그 단어는 정확히 귓가에 꽂혔다. 그랜드스탠딩이란 도덕적 허세를 의미한다. 즉, 선생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문제 삼는 제자에게 도덕적 허세를 집어치우라 말하고 있었다.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의 책 <그랜드스탠딩>의 부제는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정치적 올바름을 오용하는가”이다. 여기서 도덕적 허세란, 말 그대로 자신의 높은 도덕적 기준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작가들은 이의 대표적 예시로 SNS상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으며 과도하게 분노를 쏟아내는 이들을 말한다. ‘그런 개념 없는 말을 내뱉다니, 넌 그냥 인성이 안 됐구나. 나가 죽어라!’ “우리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놀리고 모욕하고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인인 우리가 자신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견해를 표현한 사람들을 놀리고 모욕하고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여긴다(21). 이는 우리가 신념을 중시하고, 타인이 나의 도덕성을 어떻게 평가할지 무척이나 신경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조금 무례하게 굴더라도 나의 신념과 도덕성을 더 많은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런 생각 없는 짓을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야! 잘못을 했으면 욕먹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어휴, 정말 화나!’
토시와 웜키는 도덕적 허세가 공론장을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쟁터”(31)로 전락시킨다는 면에서 그랜드스탠딩을 비판한다. 과연 세상의 모든 것을 도덕적, 정치적 범주로 나누고 눈앞의 모든 일을 자신의 도덕적 지위를 드높일 기회로 삼는 이들이 넘치는 사회에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이 생성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관절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두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위선자라는 욕을 먹을 일인가? 그를 보수주의자로 몰아가며 음해하는 것이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144-145) 미투(#Metoo) 운동 당시,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달라고 외치던 이들은 어떠한가? 나는 철저히 제삼자인 이들이 숨어 있는 피해자를 색출하며 그들에게 목소리를 내달라고 요구하던 것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함을 느꼈다. 개별 사건에 대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성폭력을 끝장내겠다는 일념 하에, 피해자를 일으켜 마이크를 건네는 것. 혹은 그 마이크를 빼앗고 자신이 확성기가 되는 것.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성폭력 생존자에게 완벽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성급히 덧씌우는 데 일조하게 된 것은 아닌가? 그랜드스탠더(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가 해로운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분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냉소를 안기기에 이롭지 못하다. 토시와 웜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랜드스탠더는 화를 자제하지 않고 그것을 악용한다. 그랜드스탠더에게는 중국 음식이 나오는 대학 식당에서부터 커피 잔을 든 채로 거수경례를 하는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그냥 모든 것이 분노의 원인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도덕적 순수성을 전시할 기회다.
그랜드스탠딩이 추동한 분노는 전반적으로 분노 표출의 가치를 절하한다. 잘 활용된 분노는 지켜보는 이들이 뭔가 일이 심각하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붉은 깃발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분노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유달리 나쁜 일들을 확인하는 그 힘이 약화된다.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인지를 과시하고 싶어서 사소한 불만거리나 특유의 도덕적 선호, 특별히 추구하는 대의명분에 대한 분노로 공적담론이 넘쳐날 때, (도덕적 이야기가 본래 갖는) 붉은 깃발의 의미가 퇴색된다. p.134-135
분노를 강화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은 장기적으로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고, 최근의 분노가 그리 분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계속 분노하는 사람들은 분노에 대응할 능력을 끝내 소진한다. 만약 분노가 엄청난 부정의의 시대에 중요한 동기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분노할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분명 핵심일 텐데, 그랜드스탠딩이 추동하는 분노는 불필요한 습관을 낳고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정말로 무엇에 분노해야 할지 감을 잃는다. p.138
토시와 웜키는 이와 같은 해로운 그랜드스탠딩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분노하는 선동주의자들에게 땔감을 주지 말라고 얘기한다. 즉, 그들의 자기 고양감을 만족시켜 줄 관심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의 조언은 논리적이며 타당하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랜드스탠더들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으면 우리의 공적 담론장은 깨끗해지는가? 토시와 웜키는 다소 추상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철학적인 측면에서 그랜드스탠딩을 설명하는데, 보다 현실적 차원에서 그랜드스탠딩이라는 비판이 쓰이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지니&조지아>의 백인 남성 교사가 지니에게 ‘그랜드스탠딩을 한다’라는 지적은 타당한가? 정말 저 상황에서 지니는 그랜드스탠딩을 한 것인가? 디즈니의 실사영화 <인어공주>(2023)에 쏟아졌던 갖은 혐오와 조롱에 맞서 영화를 옹호했던 이들은 ‘PC충’이라는 멸칭으로 비하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것이 정녕 반지성을 증명하는 일인가? 한국에는 그랜드스탠더라는 말 대신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떠한 맥락에서 쓰이는가? 사람들은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용감히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향해, 그가 목소리를 내지 않은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프로불편러라며 비난한다. 도덕적 허세는 실존하는 것이지만 도덕적 허세라는 비판은 종종 엉뚱한 곳을 향한다. 도덕적 허세를 검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런 엉뚱한 비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반지성주의는 ‘아는 것이 힘(권력 혹은 권위)’이 아니라 전혀 모르거나 알려 하지도 않고 알면서도 비틀어버린 ‘거짓과 가짜가 진실과 사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힘’이 팽배해진 상태다”(나임윤경, <공정감각>). 뉴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작금의 한국 사회는 반지성주의가 넘실대고 있다. ‘프로불편러’가, ‘정치적 올바름’이, 혹은 ‘도덕적 허세’가 반지성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의 무기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진실이 맥없이 지워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감각이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아마도 우리는 프로불편러가 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저이의 분노가, 혹은 나의 언행이 공론장을 의미 없는 전투장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