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타협하는 전업주부의 작가 도전기
널따란 마호가니 책상 한편에 비어있는 두 개의 에스프레소 잔. 나머지 한 잔엔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부유하는 먼지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쉼과 멈춤을 반복하는 타닥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 고롱고롱 낮은 숨소리. 어깨에 걸쳐둔 카디건을 의자 등받이 걸어놓고, 책상 아래 웅크려 졸고 있는 누렁이처럼 기지개를 쭉 켠다.
내가 상상하는 작가의 모습이다. 누렇게 쇠어가는 초가을 뜰이 창 밖으로 이어지고 늦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곳에서, 이따금 글이 막히면 순한 리트리버 등을 쓰다듬으며 고요히 그러나 외롭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흐린 눈의 시선을 거두어 현실의 나를 바라본다. 개수대에 쌓여있는 설거지감. 아침에 아이들이 흘린 곡물빵 부스러기와 널브러진 약병, 먹다 남아 갈변된 사과 두 조각이 4인용 식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다. 짐짓 모른 척한다. 매일 이 시간, 숙제처럼 꼬박꼬박 시청하는 교육 유튜브 채널을 켠다. 초등엄마들의 장원영인 이은경 선생님이 브런치 작가 프로젝트를 연 댄다. 브런치 앱은 오래전에 깔아 두었다가 핸드폰 용량이 부족해 과감히 삭제했었다. 쿠팡만큼 자주 들여다보는 앱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예기치 않게 전업주부의 신분으로 병가를 누리던 날, 무료한 병실에 누워 다시 앱을 깔아 글 한편을 끄적이다 퇴원 후 서서히 잊어갔다. 언젠가는 나도 브런치 작가로 글을 발행해 봐야 지란 희미한 꿈을 마음속 서랍 어딘가에 놓아둔 채로.
브런치 글쓰기 과정 5주에 00만 원.
그보다 앞서, 숨 막히는 더위에 한동안 주춤했던 동네 공원 산책을 시작하기엔 9월의 늦더위도 만만치 않았다. 동네 헬스장 전단지로 눈이 갔다. 가을맞이 할인, 3개월 이용료 25만 원. 한 달에 8만 원 남짓한 금액이지만, 막상 결제하려니 이 돈이면 큰 아이 피아노 학원비에, 작은 아이 태권도 수련비에 맞먹는 금액이라 주저했다. 등 떠밀리듯 추석 연휴를 보내고 10월이 되었다. 브런치 글쓰기 특강 홍보글을 보고 구미가 당겼으나 2주간 거듭 생각했다. 돈만 날릴 거야, 작가는 아무나 되나, 5주 동안만 열심히 하고 그 뒤로 글 쓸 일이 없겠지. EBS 입트영 강좌는 3강, 다이어리 쓰기는 3월에 머물던 나 아니던가. 차라리 이 돈으로 가을 외투 한 벌 장만할까, 아니면 돈 더 보태서 헬스장을 끊던가. 그런데 강의가 종료되는 11월 중순, 내 생일 즈음이네. 나를 위한 의미 있는 선물하나쯤 해도 괜찮지 않을까. 온전히 날 위한 선물 말이다. 모집 마감일에 이르러서야 찬기가 어린 가을 바닷물에 발끝을 담그듯, 질근 눈을 감고 결제를 마쳤다. 기회비용이 될지 시발비용이 될지 모를 막막함을 안고서.
여전히 우리 집 4인용 식탁 위에는 냄비 받침이, 물컵 4개가, 빨대 꽂힌 요구르트병 2개가, 밀폐용기에 반쯤 남은 구운 캐슈넛이, 비타민 젤리가, 초등일력 어휘장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낮잠을 자는 온순한 누렁이는 없고, 좁은 거실에서는 풀풀 먼지를 일으키며 상상 속 1대 20 혈투를 펼치는 아들과, 외롭거나 고요할 틈 없이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나불대는 딸과, 방 한쪽에 퍼스널 컴퓨터와 30인치 모니터를 차지하고 앉아 영화를 보는 남편 사이에서, 작가랍시고 식탁 한편에 10인치 태블릿을 놓고 어깨를 옹송거리며 또각또각 자판을 두드리는 내가 있다. 5층에 사는 정갈한 정장 차림의 워킹맘이 내는 하이힐 소리를 대신하여.
에스프레소 머신도, 골든 리트리버도, 가을빛 머금은 잔디도 없지만 이곳이 캐서린의 뜰이며, 나는 브런치 작가로소이다.
아, 팔꿈치에 보푸라기 일어난 카디건 하나는 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