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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Dec 31. 2023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이 좋다

몰락의 시간, 문상철, 메디치 2023

<몰락의 시간>은 널리 알려졌듯이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인 김지은씨의 조력자로 알려진 문상철씨가 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꽤 초기에 샀다고 생각했는데 맨 뒷편을 보니 초판 1쇄가 지난 11월 22일이고 2쇄가 11월 30일 발행이다. 이렇게 빛의 속도로 2쇄가 발행되다니 다행히 책은 잘 팔리는 모양이지만 책을 출판함으로써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도 권고사직을 당하셨다니 걱정이다. 책의 인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기부된다고 하니 경제적 이득을 취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 급으로 대박을 내지 않는다면 인세 수입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출판을 해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의 인생도 책만큼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책을 구매한 이유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오히려 사실 처음엔 손이 잘 가지는 않았다. 어쨌건 내용 자체는 그러저러한 폭로글이겠거니 싶었고 정작 큰 기대를 안했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덮고 보니, 이는 한국사회의 일이 풀려나가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자 조직과 리더가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일개 직장인에 불과하지만 이런 사회의 작동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책을 읽으며 순간 순간 치솟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 성과보다는 인맥으로 일을 풀어나가려는 방식: 소위 ''페이퍼' 즉 정강 정책을 글로 풀어서 완결된 구조를 만드는 실력을 갖추기보다는 운동권 인맥을 통해 유력 정치인에게 다가가 더 높은 위치와 발언권을 차지하려 드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사실 어디나 이런 내재력이 있는 사람과 드러내기를 잘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과 긴장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잘 드러내고 인맥을 잘 이용하는 것도 사실 능력이긴 하다. 자신을 남에게 잘 포장해서 드러낼 줄 아는 일도 실력 아닌가. 그래서 책에서의 ‘페이퍼'에 대한 강조는 아마도 저자 본인이 그런 실력은 갖추지 못한 원망을 드러내는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러니 페이퍼 쓰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포장 안에 든 알맹이는 부질없는 것인데, 실제 그가 우려하는 만큼 알맹이 없는 정치인들이 넘쳐나는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잘 싸우는 사람이 전면에 나서는 형국이니 더더욱.


-운동권 카르텔에 대한 비판: 형 동생 하는 운동권 문화가 아직도 남아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공적 체계를 친목모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비판도 역시 유효하기는 하다. 물론 운동권 카르텔을 호되게 비판하며 새로 등장한 이도 결국 검찰의 상명하복문화 이외의 대안 이상을 못 내놓고 있으니 답답힌 노릇이다.


- 리더의 자격: 저자에 따르면 안희정은 정치를 시작할 때 자료를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갖기도 하는 등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고 나름 팬덤에의 도취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랬던 사람마저 가장 가까운 참모를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타락했다. 그랬던 사람도 이 모양이 되었는데, 지금 이무런 준비와 마음의 가다듬음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 리더의 자아도취와 이를 악화시키는 의전 카르텔: 리더가 자신의 시간과 동선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의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필요이상으로 비대해질 때 의전을 책임지는 것 자체도 특권이 되고 리더는 의전을 누리는 것에 중독되어 본분을 잊는다. 의전의 수준과 비용을 문서화하고 제한해야 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러한 의전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권한 자체를 제한해야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도의 재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했다는 안희정의 정책이 의전에는 작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공개하고 토론하는 행정을 만들어가는 노력은 왜 의전 중독으로 선회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이 책에서는 그리 명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의전과 기타 시스템의 명과 암이 교차되는 서술방식이 그 양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 매끄럽지는 않다.


- 미래권력을 노리고 다가오는 해외 로비스트와 엘리트, 자본가, 재벌:  대선후보급으로 그 위상이 격상되면서  안희정은  "평소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로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심신이 지쳐가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자본가들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재벌 2,3세들과의 관계를 편안했고, "대화 중 구체적인 민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는 깊은 신뢰관계는 훗날 기업인들에게 더 큰 이익으로 돌아갈 것임이 명확한 자리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펠로우를 마치고 이름난 병원의 정규직의사가 되며 제약회사에서 받은 대접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보잡에서 갑자기 떠받들어지는 이로 변모한 느낌은 얼떨떨했다. 영업사원들은 단 몇 분이라도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진료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미팅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는 기꺼이 ride를 자청하고, 커피와 주스를 골고루 구비해놓고 어떤 것을 좋아하실지 몰라 다 준비했다며 기다린다. 그들은 예전처럼 촌스럽게 노골적으로 자사제품의 처방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사제품의 처방경험과 환자들의 반응을 알고 싶다고 하고, 어려운 환자를 돌보시는 선생님의 노고에 늘 감사한다고 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사실 내가 정말 그런 대접을 받아도 충분한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장기적으로 의사와 쌓은 신뢰관계는 결국 매출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제약사와 관계를 안 맺을 순 없다. 특히 신약개발과 연구를 할 때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은 원활한 협력을 위해 중요하다. 정치인과 자본가 역시 그럴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협력할 때 결국 국부가 증대될 테니까. 그러나 나에게 '을'을 자청하고 다가오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몰락의 시간>은 이 사회에서 약간이지만 권력을 가진 나에게 정신을 차리고 사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는 것을 일깨워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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