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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생사는 오타쿠 Jan 09. 2024

여우는 정말 손해를 안 보던가요?

당신이 몰랐던 여우의 비밀

가끔씩 단어 하나에 미친듯이 꽂힐 때가 있고, 최근엔 "여우"라는 단어에 그랬다. 어릴 적부터 여우라는 단어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녀 관계에서도 직장에 다닐 땐 직장에서도 말이다.


단어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날 때까지 검색해야 하는 나는 웃기게도 구글에, 브런치에, 네이버에 미친듯이 여우를 검색했다. 여우, 여우짓, 여우같은 여자, 여우같은 여자의 행동, 영악함 (이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여자 연예인도 미친듯이 검색함) 등등.


결국 한가지 내렸던 결론은 여우는 얻고 싶은 걸 얻기 위해 본심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정의를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그거 난데"였다.


지금 언급하는 여우는 스무살 초반 미팅 자리에서 "어? 언니 코 한거 아니었어?? 아니 내가 진짜 예뻐가지고 물어보는거야!!" 따위의 초급 여우짓까지 포함한다. 구체적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 건 2016년의 내가 직접 했던 발언이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자면 부러웠다, 언니의 코가. 나도 언니처럼 성형을 해서라도 그런 코를 갖고 싶었고, 그때 나는 내 얼굴 하나하나를 미워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초급 여우든 고단수든 여우짓은 본질적으로 열등감에서 시작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음에 드는 남자애의 마음을 얻게 행동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곰 같은 애들에게는 여우 같이, 여우 같은 애들에게는 곰같고 어수룩하게 행동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모든 남자애들에게는, 아니 사실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는 아픈 곳이 있다. 그걸 절대 건드리지 않고, 그 반대급부를 살살 건드려주면 애인을 만드는 것도 친구를 만드는 것도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들에게는 싹싹하고 귀염성 있게, 그리고 그런 여직원 스타일을 극도로 혐오하는 40대 여자를 상사를 모실 때는 언제나 곰 같고 수더분하게. 그래서 직장에서 늘 원하는 걸 얻었다. 당연히 그런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늘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누구지?" 그리고 그 질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차없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음의 병을 얻었다. 아무리 연기에 익숙해져도 평생 연기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가면과 연기로 점철된 연애는 당연히 내가 상처를 주거나 혹은 역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처참하게 끝났고, 직장에서는 숨이 쉬어지질 않아 화장실로 달려가 벽에 손을 대고 호흡을 내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처음에는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내게 호감을 보였던 사람들은 점차 자신이 나에게 말하는 것에 비해 나는 많은 정보를 함구하고 있다는 걸 알게됐고, 투박하고 솔직해서 가끔식 실수를 하거나 상처를 주더라도 솔직한 사람들끼리는 나보다 훨씬 깊은 관계를 맺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상담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그제야 알게됐던 것이다. 여우는 자기 진짜 모습이 싫은 사람이라고.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놓고, 원하는 목표물을 설정해놓고 그거에 따라서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건 정상적인 생활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 특히 그렇게 해서 얻어낸 관계라면, 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게 불가하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걸 계산하고 연기하는 사람이니까 상대방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이런 내가 연기해낸 모습 가짜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또 좋으면서도 싫었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여우라는 것들은 이렇게 평생 역설적인 상황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설계해놓은 모순과 거짓말을 딛고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하여간 내가 상담을 하면서 배웠던 건 여우와 곰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투박하더라도 표현하며 살아야 했고, 그렇게 표현했을 때 나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맺으면 안되었다. 그게 애인이든, 친구든, 심지어 직장조차 그랬다. (물론 직장은 여러가지 변수가 있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했을 때 그 모습조차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여우의 길을 선택해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마음의 소리마저 씹고 독하게 원하는 걸 이루는게 "찐여우" 아닌가요? 그건 선택의 문제니까 굳이 반박하기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해치면서까지 얻어야 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커리어 탑을 찍는 것도, 의사 마누라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실 여우, 가짜여우, 찐여우, 곰을 구분해가면서 살 이유가... 나도 그거에 꽂혀서 줄줄 써놓고는 갑자기 현타가 온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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