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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장인 진숙님 May 30. 2022

몸 갈아서 일하는 게 맞는걸까요

계약직+중도입사자+전임자 없음 콜라보의 우당탕탕 온보딩 일대기

이직을 하고 3개월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간의 업무 강도는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시기와 맡은 프로젝트에 따라 야근을 하거나 하루 종일 회의와 작업으로 가득 찬 날들도, 종종 주말 출근을 하거나 출장을 다니던 날들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내 낮은 연봉만큼 일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첫 회사로 기업교육 컨설팅 업체를 약 2년 가까이 다녔고, 이후 외국계 기업에서 계약한 1.5년, 계약이 끝나자 다른 외국계 기업에서 1년을 계약하고 일을 하고 있다. 워낙 첫 연봉이 낮았기 때문인지 (그 당시에도 많이 낮다는 소리를 하고 다녔고, 주변으로 듣고 다녔다. 2018년에 월급 앞자리가 1이었으니 절대적으로도 많진 않다고 생각한다.) 이직 시마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울만큼 연봉을 올렸으나 여전히 작고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도 적당히 워라밸이 챙겨지는 일상이었으므로 월급 외 큰 불만족 없이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어쨌던 매 이직의 시기가 올 때마다 과분하게도 업무적으로 좋은 기회가 찾아와 주었다.



이번 회사에서 맡게 된 내 업무는 하나의 이름으로 된 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22년 5월 현재 각자 다른 성격의 4개 프로그램을 개별로 운영하는 꼴이다. 한국 담당자는 나 혼자고, 고전적 HR 업무지만 팀은 HR이 아니라 HR 정보를 늘 요청해서 받아와야 하고 (+ 팀 및 소속 권한때문에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 팀과 팀원들은 죄다 외국에 있는 외국인들이고 (다들 영어 해 줘서 고마워요...), '이정도 업무를 이 연차에 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은가'라는 우려를 업계 선배들의 입에서 들어올 정도의 업무 난이도다. 어찌 되었던 하던 일보다 + 내 능력보다 과분한 자리고 힘든 상황이라는 것만 알아두자.


그래도 어찌 되었던 나를 믿고 이 자리에 기용 해 주셨고, 이 자리에 계셨던 FTE분이 돌아오셨을 때 '역시 진숙님보다 00님이 훨씬 좋아요. 진숙님 계시던 1년간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날렸어요.'라는 말을 듣고싶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있다. 그게 뭐냐고?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청춘이 유일하게 가진게 뭐겠어요. 몸과 시간을 갈아서 일하는 거지.



계약직+경력입사자+전임자 없음+외국에 있는 외국인 팀원들의 대환장 콜라보 상황으로 입사한 나는 우선 한달간 드러 누워서 회사 인트라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외국계 특성상 + 이 회사 특성상 모든 정보들이 각자 다른 페이지에 흩어져 있었고, 심지어 인트라넷 검색 엔진이 엉망이라 키워드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는 정보들을 왠지 여기 있을 것 같은 페이지에서 뒤지면 나오는 상황이었다. 전 직장에서는 1일 1 '이게 IT 회사냐' 모먼트가 있었다면, 여기선 1시간 1 '이게 IT 회사냐' 모먼트가 발생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도장은 찍어졌고, 알리아스는 발급되었는것을.


무슨 소린지 앞뒤 맥락을 몰라 1도 모르겠는 회의에 들어가서 Hello, Thank you bye를 빼고 아무 말 못할지라도 일단 들리는 중요한 키워드는 다 받아 쓰고, 어떻게든 뻔뻔하게 카메라를 켜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회의록도 없고 사용하는 툴 특징상 회의가 끝나면 채팅창이 사라지기에 과거에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알기 위해선 내 기억력밖에 믿을 거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첫 회의부터 뭐라도 받아 쓸 내 온노트만이 앞으로의 구명줄이 될 거란 강한 직감을 느꼈다.



그렇게 첫 한달 - 한달 반이 흐르고, 나는 누워서 지내던 나의 와식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우울증이 재발한 것이다.


다행히 자칭 정신건강 야매 준준준전문가였기에 내 정신건강의 위기를 조기에 빠르게 감지했고, '이거 2주 후면 ❤되겠는데' 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자 그 날로 바로 예전에 다니던 병원에 예약해 상담하고 약을 처방받았다. 현대 의학은 최고고, 현대 약학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다시 평소의 (자칭) 돌은자로 되돌아가 일을 벌리고 수습할 수 있게 되긴 했다. 이건 현재 진행중인 이야기라 언젠가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친구와 정기적으로 나누는 회사욕에 대한 카타르시스와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입사 한달 반 정도 이후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우선 프로그램의 모든 대상자들을 상대로 1:1을 잡았다. 그것도 Monthly로. 이 땐 미처 몰랐죠. 이게 저의 위대한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 여정의 첫 페이지였음을...


우선 제일 메인으로 가져가는 한 단위의 프로그램 참여자 열몇명을 약 4일에 걸쳐 1:1 한 결과, 수많은 현 상황과 문제점, 대처점, 앞으로 만들어야 할 프로그램, 그를 위해 설득해야 할 내 매니저 등등등 아무튼 많은 업무의 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몇몇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매니저들에게도 1:1을 걸었다. 이것도 일주일이 걸렸다. 말이 좋아 1:1이지, 콜 준비를 위한 자료 수집 - 콜 신청 및 일정 조정 - 콜 - 사후 F/u까지 하려니 콜은 30분인데 준비하는 과정만 한 콜당 최소 2시간정도 걸린다. 그것도 한 콜에. 이걸 대충 2주간 20번정도 했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점점 사라져갔다.


그래도 이 monthly 1:1을 하는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택할 의향은 있지만, 이 콜이 내 온보딩과 업무 이해 및 진행에 있어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 정신력과 시간과 체력이 깎여 나갔을 뿐...



여하튼 이렇게 진행한 1:1들로 지금까지의 히스토리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고싶은 각 개인 및 role마다의 희망사항, 그간 힘들었던 점, 더 집중하면 좋을 점들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었으니 행동으로 옮길 때였다. 입사 2달하고 1주정도 지나자 감격스럽게도 이 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나는 매달 1:1을 진행한다. 프로그램 참가자만 지금 대충 한 30명이고, 때에 따라 이들의 매니저나 동료들에게도 1:1을 건다. (먄합니다. 근데 여러분이 말씀 안 해주시면 입사 3개월차 계약직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슴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세션이 생기면 일정과 아젠다를 짜고, 스피커를 설득해 초청하고, 적당한 스피커가 없으면 내가 직접 공부해 강의한다. 한달동안 새 세션들을 만드느라 책값만 벌써 8만원이다. 청구 하고싶다. ❤❤... 정기적/비정기적으로 세션을 진행하고, 프로그램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개인별 성취도를 체크하면서 필요하다면 코칭을 하고, 커피를 사준다.


재택근무의 이점을 살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부터 일을 시작해 저녁 여섯시 반에 노트북을 덮는다. 야근을 하느니 일찍 출근하고 말지. 퇴근하면 피아노 연습 갔다 와서 게임해야 해요. 저녁이 있는 삶 절대 지켜.


주말엔 세션을 만들기 위해 산 책을 읽고, 내용을 구성하고, 덱을 만든다. 대충 주말 합쳐서 10시간정도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근 2달정도는 거의 매주 이렇게 보내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이게 내가 찾아낸 유일한 이 곳에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비록 지금까지 상담한 모든 업계 사람들이 내 연봉과 내 업무를 듣고는 '진숙씨 그 정도면 연봉 더 받아도 돼요.'란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튼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 재밌으니 한다..


인트라넷의 사내 인명록? 시스템에는 그 사람이 이 회사에 입사한지 오늘로 며칠째가 되었는지를 (몇년/몇달/며칠째인지) 알 수 있다. 오늘 나는 3months 5days를 찍었다. 일반적으로 온보딩에 걸리는 시기를 3개월정도 잡는다. 이정도면 셀프 온보딩... 나쁘지 않게 한 게 아닐까?


그렇지만 몸 갈아서 일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배울 의향 있습니다.

아시는 분 계신다면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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