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by 민서

시험이 막 끝난 금요일 저녁, 대량으로 음식을 만드는 영상을 거실에 틀어 두고 가족들과 거실에 늘어져 있던 와중이었다. 한 분식집에서 꼬마 김밥을 대량으로 만드는 영상을 보던 중, 갑자기 무엇이든 실효성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였다.


– 엄마, 먹고 싶은 거 있어?


– 음···. 김밥?


간단한 대화로 정해진 토요일의 계획. 그렇게 한가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엄마의 퇴근은 1시, 기상은 8시. 느지막이 일어나 준비하다 보니 어느덧 10시였다. 충분하지! 생각하며 집을 나서니 11시. 단출한 장보기 목록을 들고 마트로 터덜터덜 걸었다. 헤드셋에서 최대 볼륨으로 재생한 음악은 경쾌했고,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유아차 속 아기가 귀여웠으며, 머리 위로 떨어진 은행 한 이파리는 괜스레 반가웠던 꽤나 좋은 시작이었다. 마트로 들어서 카트를 끌고 가장 먼저 신선 코너로.


■단무지

□우엉

■김밥 햄

■맛살

■어묵

□깻잎

□시금치

□계란 지단

■당근

■유부

+콩나물!(콩나물국 끓여 먹자


먹고 싶다는 재료들을 마구 써 내려간 결과 상당히 난잡해진 목록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은 역시 야채였다. 3 뭉치 1,780원 깻잎을 가볍게 담고, 시금치를 찾았다. 하나는 단, 하나는 플라스틱 박스. 처음에는 박스에 담긴 시금치밖에 보지 못하고 냉큼 집었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 단으로 진열되어 있는, 양이 조금 적어 보이는 시금치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한 번 하고 말 건데, 너무 많이는 필요 없으려나—생각하며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저렴한 걸 사자! 하고 성심껏 비교해 가며 고른 플라스틱 시금치를 내려 두었다. 그러나 정작 가격을 보니 단 시금치가 가격은 높은 반면, 양은 더 적었다. 알고 보니 플라스틱 시금치(남해)가 행사 중이었다. 단 시금치(한산도)에서 조용히 돌아서며 내려 두었던 플라스틱 시금치를 다시 카트로 데려왔다. 시금치는 2,480원. 아직은 야채가 비싼가 보다.


채소—급한 것은 해결했으니 내 간식이라도 하나 살까, 하는 해이한 마음가짐으로 노브랜드 코너로 향했다. 요즘 노브랜드, 밀키트가 그렇게 잘 나온다던데. 냉장 코너를 휘적휘적 둘러보고 있자니 콩나물이 눈에 들어왔다. 콩나물···. 콩나물···? 아! 엄마가 콩나물국도 끓이자고 했는데. 한 봉지, 400g에 2,000원도 하지 않는 콩나물을 냉큼 담고, 정작 간식은 새하얗게 잊은 채 돌아섰다.


마지막, 우엉. 마트를 한 바퀴 돌아도 찾지 못했다. 양념이 되지 않은 우엉채, 혹은 흙이 그대로 묻어 있는 통 우엉까지 봤지만 정작 사려고 한 간장 우엉은 실패. 김밥용 햄과 소시지가 몰린 코너에 가 봤지만, 김밥 만들기 세트라며 한 봉지에 다 들어 있는 것만 있고 우엉만 들어 있는 제품이 없었다. 하지만 답은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들어간 노브랜드 코너! 우엉과 단무지를 함께 포장한 제품, 우엉 절임(조림?)만 들어 있는 제품 이렇게 두 가지나 있었다. 어차피 엄마가 단무지는 집에 있다고 했으니까, 하는 매우 오만한 생각으로 우엉만 들어 있는 쪽을 샀는데···. 엄청 후회했다. 속사정은 후에 다시 서술.


계산대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동물 코너에는 이런저런 특이한 녀석들이 상당히 많아져 있었다. 물고기들이야 늘 보던 얼굴들이니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앵무새, 소라게, 달팽이, 거북이, 햄스터까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자니 묘한 기분이었다. 유리창이 좁아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 공간 속 여러 마리를 두는 것이 굉장히 별로였다. 한때 햄스터를 키워 봤던 사람으로서 저거, 엄청 안 좋은 행동인데. 저러다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물어뜯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그렇다고 뭘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주말 낮 시간대여서인지 무인 계산대를 관리하는 직원은 없었다. 덕분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자두맛 젤리라는, 640원어치 일탈을 챙겨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집에 가는 길 다이소도 한번 들르고, 시계도 고치고, 커피도 포장하며 여유롭게 걸으니 귀가는 12시였다. 엇. 큰일이다. 엄마 퇴근은 1시인데, 내가 김밥을 1시간 만에 만들어 낼 실력이 될까? 안 되면 되게 하라―이럴 때 쓰는 말이 맞나 싶지만, 마지노선은 1시. 되게 해야만 한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역시 쌀 씻기. 오로지 백미만 담긴 볼을 자박자박 씻고 있자니 손이 시려웠다. 허여멀건한 쌀뜨물은 어째 끝이 없이 나오고, 손끝은 벌겋게 시려 오고. 이 탓인지 평소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물조절을 실패했다! 김밥에 죽밥이라니···. 물이 너무 많았다.


다음은 당연스럽게도 아주 익숙한 재료인 당근이다. 냉장고 서랍 구석에 박혀 있던 세척 당근을 꺼내 반으로 동강 내고···. 어라. 생각보다 당근은 단단했다. 빈약한 손목과 무딘 식칼로 해치우기에는 꽤나 강적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불러 처리시키려던 찰나―뚝. 당근을 반 정도 관통한 식칼이 뭉툭한 소리를 냈다.


- .. 어라. 됐네.


- 그럼 난 왜 부른 거야?


- 됐어, 됐어. 너 이제 가. 필요 없어.


다시 열심히 채 썬 당근. 균일한 길이,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며 썬다는 것은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당근에 비해 무른 양파 정도라면 훨씬 쉬웠겠지만, 단단해서 그런지 자꾸 수직이 아닌, 비스듬한 방향으로 칼이 내려갔다. 영 빈약한 결과물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팬에 쏟아 넣었다. 기름 조금, 태운 간장 조금, 올리고당 조금 넣어 가만 볶아지도록 두고, 다음으로 꺼낸 것은 계란.


계란말이는 자신 있었다. 요리 깨나 한다는 사람들도 어렵다지만, 계란말이만큼은 왠지 쉬웠다. 하지만, 지단? 지단은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김밥에 계란말이가 들어가면 그건 계란 초밥이 돼 버리잖아. 계란 네 개를 꺼내 툭툭 깨뜨리고, 소금 한 티스푼을 넣어 저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덜 섞였던 것 같다. 다 만들고 엄마가 맛을 봤을 때 소금이 한 군데에 뭉쳐 있었기 때문. 젓가락을 휙휙휙휙 돌리듯 젓다 보면 어느 순간 계란이 한 뭉치가 된 것처럼 움직이는데,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요리의 고수가 된 느낌이랄까?


만든 계란물로 지단 세 판을 구울 작정으로 팬 위에 계란을 얇게 부었다. 그렇지만 미리 예열도 하고, 키친타월로 전체를 닦으며 코팅도 했는데···. 정성이 모자랐나 보다. 얇은 가장자리 부분이 팬에 달라붙어 뒤집다 찢어졌다. 쳇, 하고 아쉽게 혀를 차면서도 주섬주섬 지단의 잔흔을 주워 도마로 옮겼다. 이번에는 조금 더 두껍게 해 볼까. 그러면 안 찢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남은 계란물을 전부 부었다. 정말 이 지단마저 찢는다면, 나는 계란말이 장인이라는 자칭 타이틀은 반납이다. 약불을 유지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다렸다. 젓가락으로 모서리를 살며시 들어 올리자 희미한 갈색 빛이 도는 것이 보였다. 뒤집개를 살살 흔들어 받쳐 넣고···. 착! 완벽한 안착이었다. 후, 확실히 두꺼우니 한결 쉬웠다.


지단은 식히고 썰기 위해 도마로 옮겨 두고, 계란물을 풀었던 계량컵을 물에 대충 씻었다. 그 속에 물을 떠 두고 냉동실에서 방금 꺼내 부스스한 얼음이 한가득 낀 어묵 세 장을 넣었다. 어묵은 조금 이따 하기로 하고···. 아, 당근! 다행히도 중간중간 저어 주었던 당근은 약간 어두운 주황빛을 띠며 알맞게 익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통으로 당근을 옮겨 담은 후, 같은 양념 같은 팬으로 어묵을 볶았다. 해동이 덜 된 어묵을 자르느라 반동강이 나 길이가 짤막해진 것은 안 비밀.


다음은 시금치. 엄마는 그냥 간단한 오이를 넣으라고 했지만 꿋꿋하게 사 온 재료인 만큼 맛있어야만 했다. 오이를 거절한 이유는···. 첫째, 이미 단무지가 있는데 굳이 아삭한 재료가 더 필요하지 않다. 둘째, 오이는 초무침처럼 양념이 됐을 때 훨씬 더 맛있다. 흙이 묻은 시금치를 싱크대에 들이붓고 차가운 물로 찰박찰박 씻기 시작했다. 어떻게 손질해야 좋을지 몰라 팽이버섯 자르듯 뿌리를 전부 잘랐는데···. 나중에 혼났다. 뭐, 어쨌든 때 하나 묻지 않도록 곱게 씻은 시금치는 양이 꽤 많아 보였다. 김밥 한 번 하는데 너무 많으려나, 싶어 반은 덜어 두고 반은 미리 끓여 둔 물에 데쳤다. 겨우 30초라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새 시금치를 건진 물은 진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데쳐 숨이 죽은 시금치를 보니 양이 얼마 되지 않길래 덜어 두었던 나머지 반도 모조리 데쳤다. 차가운 물에 참방참방 헹구고 엄마가 당부한 대로 물기를 꾹꾹 짜니 정말 주르르륵- 하고 물을 뱉었다. 이미 잘렸지만 그래도 식물의 본능이 남은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볼에 시금치를 옮겨 담았다. 참기름 조금, 간 깨 조금, 소금 조금. 조물조물 무치고 어느새 퇴근해 버린 엄마 입에 쏙 넣어 주자 싱겁단다.


- 어때?


- 싱거워.


역시 음식 할 때 제일 어려운 건 간 맞추기인 것 같다. 비염 때문인지 후각도 미각도 영 둔해서 웬만큼 자극적인 맛이 아니면 구분이 어렵다. 소금을 조금 더 쳐 시금치를 완성하고, 냉동 유부를 해동하고, 맛살을 썰고, 단무지를 꺼냈···어라. 분명 있었는데? 설마 김밥에 단무지가 빠지는 거야? 냉장고를 아무리 뒤져도 노란색은 없었다. 젠장. 이럴 거였으면 아까 우엉과 단무지를 사는 거였는데. 엄마는 어쩔 수 없다며 씻은 김치를 넣자고 한다. 임시방편이네. 그래, 하며 우엉 절임의 포장을 열었다.


다음에 또 잊어버릴 것 같아 미리 적어 둔다. 김밥 김은 가로로, 거친 면이 밥이 닿는 안쪽. 밥은 손으로 뭉개듯 하지 말고 빈틈은 없되 조금만 넣을 것. 재료 역시 너르게 넣기보다는 위로 층층이 쌓기. 첫 도전! 처음에는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옆구리가 터졌고, 뒷부분은 힘이 모자라 완전히 봉합되지 않아서 헐거웠다. 괜찮아. 첫 시작에 김밥의 형태가 나왔다면 우수한 성적이지. 두 번째 도전. 엄마가 도저히 안 되겠다며 밥은 직접 펴 주었다. 왠지 모르게 패배한 기분. 이번에는 초장에 힘을 꾹꾹 주며 당겼다. 마지막 봉합이 조금 허술했지만, 터지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꽤나 성공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 세 번째 역시 가감 없이 비슷한 성공이었다. 거기에 엄마가 싼 두 줄을 더 곁들여 점심 식사를 마쳤다. 저녁이 되어 엄마에게 김밥 먹고 싶다니 비로 대령하는 이런 딸이 어딨어, 하고 너스레를 떠니 엄마는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직 한참 멀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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