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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봉기 Sep 18. 2024

자기 잇속에만 눈먼 이들에게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지 남을 위해 사는 이는 없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주변과 거리를 두고 살며 자기 잇속만 차린다. 따라서 필요할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찾아 목적을 이루고는 막상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등을 돌리는 것이다. 'Give and Take'란 말처럼 남에게 베풀면 그만큼 받게 되는 게 인간세상의 이치인데 'No Give and Take only '라는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건 결국 고립일지 모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에게도 과연 개과천선의 기회가 찾아올까? 일반적이진 않지만 그럴듯한 스토리를 한번 구상해 본다. 부유한 집에서 막내로 태어나 부모나 손위 사람들이 주는 것만 받아먹다 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한 인간이 손을 썼는지 병역도 면제판정을 받게 된다. 그러니 단체생활이나 험한 일과는 거리를 둔 채 철저한 에고이스트의 삶을 산다. 자기 일에는 목숨까지 걸고 뜻을 이루지만 남들과 힘을 모아야 하거나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에 나 몰라라 하니 주변사람들로부터 지밖에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늘 한결같이 "내 맘이다"라는 아집만으로 사는데 우연히 자기와 똑같은 인간을 만나 자신이 해오던 것과 똑같은 일을 이번에는 피해자로서 경험하게 된다. 이전에 자신이 남들에게 하던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모습이 마치 거울로 보듯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한 후 드디어 세상이 개벽하듯 바늘로 찔러 피한방울 나오지 않던 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 순간 깊은 반성을 통해 마치 크리스천을 박해하던 바오로가 어느 날 모래바람 속에서 계시를 받아 하느님을 믿게 되는 새로운 인간이 되듯 에고이스트의 삶만 살아온 그에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 이러한 스토리가 과연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가해자는 사실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그  잘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평소에 남들이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있다. 특히 세상을 떠날 때 찾아오는 조문객의 숫자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옛말에 "정승집에 개가 죽으면 사람이 들끓지만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해관계 때문에 하는 형식적인 조문과 달리 한 인간의 타계 소식을 듣고 애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삶의 성적표가 되리라 보인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건 과연 뭘까? 짐승은 자신이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상대편을 물어 죽이지만 양심의 가책이란 건 없다. 반면 인간은 남에게 조그만 피해를 줄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게다가 인간은 동물과 달리 비단 자신이 아닌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할 경우에도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잇속만 채우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인간만의 특권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기밖에 모르는 이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태도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초근시안적인 자신에게도 결국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넓게 보면 지나치게 이기적일 경우 자신도 결국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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