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가?

양자역학이 우리 삶에 던지는 깊은 질문

by 고발초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당연함 속에서 산다.

창밖의 나무는 우리가 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고,

탁자 위의 컵은 우리가 돌아보지 않아도 존재한다.

이처럼 "관찰(observation) 하지 않아도 세상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우리의 상식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낯선 학문이 등장하면서

이 기본적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은 단순히 물리학을 바꾼 것이 아니라,

"존재(existence)란 무엇인가", "인식(perception)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짜(real) 세계를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글은 그런 깊은 물음 가운데 하나,

"관측(observation)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양자역학과 철학(philosophy)이 우리 일상에 던지는 사유(contemplation)의 가능성을 풀어내고자 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존재를 둘러싼 실험

이 질문을 이야기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물리학자(physicist)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제시한 유명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상자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그리고 고양이를 죽게 할 수도 있는 독극물(poison) 장치가 함께 있다.

그 장치는 어떤 양자입자의 상태(state)에 따라 작동하게 된다.

문제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양자입자가 "방출(emission)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즉, 고양이는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동시에 겹쳐 있는 것"처럼 된다.

이것을 양자역학에서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라고 부른다.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통해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해석이 현실적인 물리 세계에 과연 타당한가?"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paradoxically), 이 실험은 지금까지도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인용되고 있다.


관측 이전의 세계는 모호하다

양자역학의 기초적인 실험 중 하나인 "이중 슬릿 실험(double slit experiment)"도 흥미롭다.

전자(electron) 하나를 아주 좁은 틈 사이로 쏘아 보내면,

전자 하나는 마치 파동(wave)처럼 퍼지며 여러 지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가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그 전자는 더 이상 파동처럼 행동하지 않고,

하나의 입자(particle)처럼 특정한 궤적만을 따라간다.

즉, 관측(observation)하는 순간 전자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관측 전에는 "가능성(possibility)의 상태", 관측 후에는 "결정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세상은 우리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이

양자 수준에서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

이쯤 되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본다는 행위는, 세상에 영향을 주는가?"

"관찰자는 단순한 구경꾼(spectator)이 아니라, 세계를 결정짓는 주체(subject)인가?"

양자역학은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전통적인 물리학은 언제나 관찰자(observer)와 대상(object)이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말한다.

"관찰자 없이는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이 말은 단순한 과학적 실험을 넘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깊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인식이야말로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일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삶에 적용되는 양자적 사고

이러한 양자적 사고(quantum thinking)는,

비단 실험실 안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 관계(relationships), 기억(memory), 감정(emotion)에서도

"관찰(observation)과 해석(interpretation)이 곧 존재를 정의한다"는 진실은 자주 드러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행동을

"무관심(indifference)"이라 해석하면 우리는 상처를 받고,

"배려(kindness)"라 해석하면 따뜻함을 느낀다.

동일한 사실도 "내가 어떻게 관찰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즉, 우리는 매일매일

"세계의 일부를 인식하고, 그 인식대로 세계를 구성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unconsciously) 세상을 구성한다.

"나는 그냥 바라봤을 뿐인데, 그 대상은 이미 내 판단(judgment)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이 말은 단지 심리학적(psychological) 진실이 아니라,

존재론적(ontological)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perspective)이 달라질 때, 세계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의 말투를 불친절함(rudeness)으로 느끼는 순간,

그 사람 전체가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반대로,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를 해석하면

같은 말투조차 조심스러운 배려로 다가온다.

이처럼 세상은 단단한 실체(solid reality)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이 머무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빛나고, 다르게 멀어진다.

그러니 "관측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양자역학의 해석은

결국 물리학(physics)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관통하는 감각(sensibility)의 진실이기도 하다.


관측은 권력이고, 동시에 책임이다

관측은 중립적(neutral)이지 않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해석하고, 이름 붙이고,

가치(value)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시선은 선택적이고(selective), 모든 판단은 해석적이다.

그래서 관측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삶을 결정짓는 권력(power)이자, 동시에 책임(responsibility)"이다.

우리가 타인을 판단할 때,

우리가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

우리가 스스로(self)를 바라볼 때조차도—

그 '관측의 방향'에 따라 우리의 관계, 감정, 정체성(identity)까지 변한다.

그리고 이런 인식(perception)의 차이가 모이면,

삶 전체의 궤도(trajectory)마저 바꾸게 된다.

같은 하루를 전혀 다른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보는 순간 존재가 시작된다

양자역학은 말한다.

"존재(existence)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possibility)으로 가득 찬 상태(state)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누군가가 그것을 '보는 순간' 현실(reality)이 된다.

이 관점(viewpoint)은 놀랍도록 시적인(poetic) 동시에 실천적(practical)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선택하는 순간, 하나의 현실이 만들어진다.

그 현실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실패하거나 후회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바라보고, 결정하고, 행동한 그 순간만이

"실제로 존재한 시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묻게 된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나는 지금 누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시선이 내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무관심, 존재를 지우는 또 하나의 관측

"보는 순간 존재가 시작된다"는 말이 참이라면,

그 반대도 어쩌면 진실일 것이다.

보지 않으면, 존재는 점점 사라진다.

이 말은 단지 물리학의 명제(proposition)가 아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그리고 인간관계의 틈새마다 조용히 스며든 "감정의 공식(emotional formula)"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도,

무관심(indifference)은 곧 존재의 지워짐(erasure of being)으로 이어진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기억 속에서 점점 흐릿해질 때,

사람은 자기 존재의 무게(weight)마저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마치 먼지처럼,

있되 없는 것처럼 취급되며

그저 "존재하던 기억"이 아닌 "지워진 가능성"이 되어간다.


보이지 않는다는 고통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pain) 중

가장 깊고 길게 남는 것은 "무시당함(neglect)"이다.

폭언(verbal abuse)도, 갈등(conflict)도, 실망(disappointment)도

모두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속에는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다는 "증거(trace)"가 남아 있다.

그러나 무관심은 다르다.

아예 바라보지 않는 것. 아예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것.

이 무관심은 존재의 뿌리(root)를 흔들어 놓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그 말을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때,

그 말은 의미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그 사람은 서서히 자기 존재에 대해 "의심(doubt)"하게 된다.


무관심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수많은 존재를 스쳐 지나가고 있다.

늙은 부모님의 침묵(silence),

자녀의 눈에 잠깐 머물렀던 망설임(hesitation),

늘 같은 자리에 있던 동료의 피로함(fatigue).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관측’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존재들은 "있었지만 없던 것"이 된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중첩(superposition) 상태'"처럼,

그들은 "말하지 않은 감정과 표현되지 않은 피로" 사이에서

끝내 하나로 고정되지 못한 채(unrealized),

그저 그렇게 흐릿한 가능성으로 사라져 간다.


다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자주

"다시 바라보는 연습(practice of attention)"을 해야 한다.

의도적으로(deliberately), 천천히, 조용히.

가족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물어보고,

혼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 모든 작은 ‘관측’이

"다시 존재를 되살리는 일(resurrecting presence)"이 된다.


존재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종종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inaction)"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wound)"가 될 수 있다.

"나는 너를 보고 있어."

이 짧은 시선 하나로, 우리는 서로를 다시 존재하게 만든다.

사람은 참 신기한 존재다.

자기 자신을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데조차

"누군가의 시선(someone’s gaze)"을 필요로 한다.

"나는 누군가의 인식(perception) 안에 있다"는 감각,

"나는 잊히지 않았다"는 확신(assurance).

그것 하나에 기대어 삶은 다시 이어진다.


관측은 연결이다

관측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다.

그건 일종의 "정신적인 연결(psychological connection)"이다.

현대는 정보(information)가 많고 소통(communication)이 쉬워졌지만,

그만큼 ‘제대로 본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스크롤로 넘기며 지나치는 것, 흘깃 스쳐보는 것.

그건 관측이 아니다.

*관측은 정지(pausing)이고, 몰입(immersion)이고, 감정의 일시적 공유(shared feeling)"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잠시 넘어

타인의 감정이 내 안에 머무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같이 있음(presence)의 진짜 감각이다.


관측은 치유다

이 모든 걸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 자체로 "치유의 시작(beginning of healing)"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말을

누군가가 조용히 건네줄 때,

사람은 문득

"나는 그냥 투명한 존재가 아니었구나" 하고 되새긴다.

그 짧은 순간, 마음은 다시 피어난다.

'고통의 무게(weight of pain)'를 함께 들어주는 감각.

그게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어쩌면 이 세상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는

제대로 바라보는 것일지 모른다.


삶은 결국, 서로의 관측으로 이루어진다

양자역학이 말하듯

"존재는 관측될 때 비로소 결정된다."

우리는 그것을 과학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건 동시에

"인간 존재의 시적 진실(poetic truth)"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하고, 불러내고, 안부를 묻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서로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

그게 삶이고, 그게 사람이다.


우리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방식

"관측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가?"

이 물음은 단지 물리학의 이론이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묻는 삶의 질문이다.

"당신은 오늘 누구를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당신의 시선은 누군가를 살렸는가?"

그 물음 하나만으로,

우리는 다시 의미 있는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그 시선 하나에서, 다시 삶이 시작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