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성적표가 나오던 날부터 우리 집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 앞에 의기소침해진 아들을 보며, 부모인 우리 부부의 마음도 한구석이 눅눅했다.
작은 키에, 이제 곧 마주할 대학 입시의 결과도 불투명해 보이는 상황. 아들이 짊어진 '낙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여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 내 여자친구야."
당황한 남편과 나의 눈앞에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사귄 지 고작 5일.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다음이었다. 이 여학생이 지난 4년 동안 우리 아들을 짝사랑해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4년이라니. 아들이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따뜻한 마음을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아들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씻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이제 좀 철이 드나 보다' 싶었는데, 그 동력이 '사랑'이었다니.
부모인 내 눈에는 여전히 작고 부족해 보이는 아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4년을 기다려온 단 하나의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한 울림을 주었다. 우리가 아들의 성적표와 외형적인 조건에 매몰되어 있을 때, 아들은 이미 누군가의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었다.
수능 점수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좌절했던 며칠 전의 시간이 무색해졌다. 대학 간판이 인생의 성패를 결정지을 것 같아 노심초사했던 부모의 마음이 한순간에 부끄러워졌다.
인생은 참으로 묘하다. 한쪽 문이 닫혔다고 생각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문이 열린다. 아들이 얻은 것은 단순한 '여자친구'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긍정해 주는 한 사람의 시선'일 것이다. 그 시선 덕분에 아들은 스스로를 가꾸기 시작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었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를 일이다."
졸업식장을 나오며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말을 내뱉었다. 비록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지도 모르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걱정보다 기대가 앞선다.
오늘 아들의 손을 잡고 수줍게 웃던 그 아이 덕분에, 우리 가족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낙오'란 없다는 것, 그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뒤엔 반드시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들의 '5일 차 연애'가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