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승소의 진실

by 루비하루


소송은 사람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삶 자체를,
피보다 진한 시간과 정신,
그리고 자존감까지 천천히 증발시킨다.


며칠 뒤,
등기우편으로 판결문이 송달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피고는 원고에게 임차권 등기 비용 40만 원과
이에 대한 법정이자를 지급하라.”


그 한 줄.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임차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판결문 확인했습니다.
얼마를 보내드리면 될까요?”


답이 없었다.

며칠 후,
전자소송 시스템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원고 항소”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또? 또 시작이야?’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머리를 감쌌다.

법정에 다시 나가야 하나

또 답변서를 써야 하나 그때마다 조여 오는 심장을

이명 소리를…
나는 또 견뎌야 하는 걸까.


남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항소는 겁주기일 수도 있어. 그냥 시간 끌기나 부담 주려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이미 바닥에 닿아 있었다.


며칠 후, 또 하나의 알림이 떴다.


“항소 취하.”


정말… 끝인가.

하지만 끝이라도, 기쁘지가 않았다.

내 안의 무언가는 이미 너무 많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항소는 취하되었다.

그래.
이제 진짜 끝났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임차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판결문 확인했습니다. 얼마를 보내드리면 될까요?”


몇 분 뒤,
답장은 없고 엑셀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첫 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급 요청 총액 : 10,000,000원’

그 아래에는 조목조목 나열된 항목들.

임차권 등기 400,000원

소송 준비비 200,000원

정신적 피해보상 1,000,000원

변호사 선임료 3,300,000원

지연이자 5,100,000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중 법원에서 인정된 건 40만 원.

나머지는 임차인의 마음속에서 계산된,

‘감정값’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를 보내드리면 될까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엑셀표 보고 이자 계산해서 보내세요.”


한참을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내가 감당할 현실인가…’

법이 판결하지 못한 영역에서,
또 다른 폭력이 시작되고 있었다.

임차인은 정확한 액수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40만 원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이자는요?”

나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얼마를 보내요? 금액을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그 답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조롱, 계산, 기세...
그 모든 것을 한 줄로 삼킨 뒤,


나는 천천히 문자를 보냈다.

“그러시면, 소송비용확정 신청하세요.”


더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설득도, 사과도 필요 없었다.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끝은 살짝 떨렸지만,
기분은 처음으로 평온했다.

나는 이제, 상대방의 감정과 욕망을
계산해주지 않기로 했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다시는 통화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전화가 걸려왔다.

“소송비용확정신청을 하려면 피고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 소송할 때 저한테 소송한다고 주민번호 물었었나요?”

“그땐 변호사가 알아서 했어요.”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말투는 차분했지만, 나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지친다는 말조차 지칠 정도였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는 그 어떤 설명도, 감정도 얹지 않았다.


며칠 후, 등기우편이 도착했다.

‘소송 비용 결정문’

나는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심호흡을 하고, 종이를 꺼냈다.

“총비용 확정액: 48,600원”


나는 눈을 의심했다.

4만 8천6백 원.

임차인은 엑셀표로 1,000만 원을 요구했다.
법원은,

40만 원의 이자 48,600원을 인정했다.

국가가 정한 공식 소송비용은,
그들이 주장한 ‘감정의 총합’의 1/20도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가 보냈던 문자가 떠올랐다.

“엑셀표 보고 보내세요.”


그 말이, 이제는 우습게 들렸다.

나는 다시 되뇌었다.


일부 승소 판결을 받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50만 원 정도를 먼저 보내볼까?’

조정 당시,

500만 원에 합의할까 망설였던 적도 있다.

심지어 소장을 처음 받았을 때, 원고 측 법무법인에 전화를 걸어 ‘1,000만 원 주고 그냥 끝내자’는 마음이 스쳤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1년 동안 소송을 했고,

결국 천만 원을 지켜냈다.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지켜냈다.


바로

내 목소리,

내 권리,

내 진실이었다.


이건 단순한 민사소송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을,

나라는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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