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터마이징의 여지를 남기는 '비움'
고급 주거의 인테리어 설계를 하던 시절, 결과물을 두고 자주 듣던 피드백이 있다. "너무 밋밋해요." "포인트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럴 땐 상상력을 총동원해보시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입구의 빈 벽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걸고, 거실 한쪽에는 오래 아껴온 빈티지 조명을 두는 것만으로도 그 집은 단숨에 나를 드러낸다. 처음엔 깨끗한 백지처럼 보였던 공간이지만, 살면서 하나씩 채워나가는 그 과정 자체가 곧 취향이다.
그게 하이엔드 주거라면 더욱 그렇다. 남다른 안목으로 시간을 들여 수집해온 수준 높은 가구와 예술품들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과한 장식 없이 정제된 바탕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채움이 아니라 바로 비움의 방식이다.
하이엔드 주거에서 공간의 완성도는 오히려 덜어낸 구조에서 시작된다. 정해진 기능과 동선을 강하게 고정하기 보다는 사용자의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설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특히 슬라이딩도어는 이 유연함을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장치다. 벽처럼 보이지만 필요에 따라 열리고, 열리지만 분리되는 경계의 유연함. 하이엔드 주거의 마스터룸(Master's Bedroom)에서는 침실과 서재, 혹은 파우더룸 사이에 주로 사용되며, 때로는 공간을 나누고, 때로는 넓게 연결한다. 고정된 벽이 아닌 선택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거주자는 삶의 변화에 따라 공간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앞의 시리즈에서 다뤘던 방의 개수와 같은 맥락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은 단순한 여분이 아니라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담는 캔버스가 된다.
이처럼 단순화된 구조는 '비워 둠'이 아니라 나다운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사용자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다. 기능은 최소화 되었지만 그 쓰임은 무한히 확장된다.
하이엔드 주거의 미감은 언제나 '보여주기' 보다 '받쳐주기'에 가깝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어떤 오브제와도 조화롭게 어울리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 주거에서는 과도한 장식이나 눈에 띄는 컬러를 최대한 절제한다. 대신 무채색에 가까운 톤, 질감이 느껴지는 천연 마감재, 빛을 부드럽게 흡수하는 무광 마감이 주로 사용된다. 바탕이 정제되어 있을수록 사용자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어떤 가구나 오브제를 놓더라도 그 자체로 공간과 어우러진다.
이러한 마감은 기능처럼 눈에 띄는 요소는 아니지만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재료 하나에도 질감, 색감, 빛의 반사까지 섬세하게 고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스러운 소재가 주는 편안함, 무채색 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지속성, 절제된 디테일이 남겨주는 감각의 여백. 겉으로는 단순해 보여도, 좋은 마감재를 고집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이엔드 주거에서는 공간의 역할을 먼저 정의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구조와 미니멀한 설계를 통해 사용자가 스스로 채워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벽면에 있어서도 장식보다는 비움의 미학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일반적인 아파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트월이나 포인트 벽은 시선을 하나의 지점에 고정시킨다. 반면 하이엔드 주거에서는 이러한 인위적인 장식을 배제하고 전체 벽면을 하나의 캔버스처럼 다룬다. 그림을 걸거나 선반을 놓는 위치, 혹은 아무것도 두지 않는 선택까지 거주자의 취향에 맡기는 것이다.
공간은 결국 살면서 채워진다. 처음에는 조금 비어 있는 듯해도, 취향을 담을 바탕이 된다면 오히려 좋다. 단정한 선, 절제된 소재, 무채색 톤이 만들어내는 정제된 공간 안에서 거주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각을 드러낸다. 그렇게 완성된 공간은 결국 '나답다'는 감각을 품게 된다.
하이엔드 주거란 결국 남다른 안목을 담기 위한 미니멀한 배경을 얼마나 섬세하게 설계했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보여주기 위한 포인트가 아닌, 거주자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마련된 무대. 그 절제된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진짜 취향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