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것도 하지않기로 한 날

by 카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날

토요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날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밖에 나가지도 누구를 만나지도 일거리를 만들 지도 않기로 했다.

말하자면 에너지를 소비할 만한 특별한 일은 안 하기로 한 것이다.

오늘도 늦잠을 자거나 tv를 보거나 빈둥거리며 동네 한 바퀴 정도 할 계획이었다.

아점을 먹고 tv를 졸다 보다를 반복하다가 채널을 다 돌려봐도 흥미 있는 프로가 없었다.

마침 옆에 있는 딸아이의 갤럭시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동영상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동영상이나 볼까 하고 패드를 열었는데 비번이 걸려 있었다.
예전에 번호를 가르쳐 줬는데 아리송해서 물어볼까 하고 보니 중간고사 마치고 첫 주말이라 아이는 곤하게 자고 있었다.
깨워서 물어보자니 미안하고 그냥 기억나는 대로 화면을 눌러보았다.
입력이 잘못되었는지 몇 번을 껌뻑이던 패드는 pin번호를 넣으라며 아예 잠기고 말았다.
잠이 깬 아이에게 물어보니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잘못하면 초기화해서 데이터가 다 날아간다고 울상이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마음대로 쓰라고 던져주고 가놓고선 언성을 높이는 아이를 보자 나도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내가 해결해 준다니 놔두라면서 자기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버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보내려고 했는데 이게 뭐람!’
집에 있으면 또 싸울 것 같아 밖으로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시장통을 지나다 보니 과일전에 놓인 크고 탐스런 밤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이거 얼마예요?”
“1kg 만원입니다. 공주밤 입니다.”
'가을엔 또 밤이 최고지.'
밤 1kg을 사서는 또 터벅터벅 걷다가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다

갑자기 어디서 비둘기 두 마리가 다가와서는
먹을 것이라도 내놓으라는 듯
주위를 서성이며 내 눈치를 본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먹이들을 준 모양이었다.
유해조수라고는 방송에서 떠들어 대는 걸 봤지만 눈빛이 너무 애처로워서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밤 하나를 이빨로 까서 조금씩 던져주니 맛있게 먹는데 두 녀석이 서로 먹으려고 싸우기까지 한다. 조금 있으니 어디서 왔는지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이런! 여기도 편하게 쉴 곳이 못되구나.'

벤치에서 일어나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니 어느덧 짧은 가을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날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있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가서 집안 일도 좀 하고 밤도 삶고, 세탁기도 좀 돌리고 오래간만에 글도 한번 올리자.‘

또 이렇게 한 번의 가을날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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