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는 비행 3️⃣(마지막 편)

3편, 그날 거울 속에는 박명수가 있었다

by 비트윈랜딩

그날 밤


결국 우리는
조금 더 쉬게 된다.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출근 시간이
조금 더 뒤로 밀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제대로 쉬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문제는
짐이다.


사이공 호텔 방에는
내 짐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본사에서는

사무장과 부사무장,
그리고 다른 팀의 사무장과 부사무장 감독 하에
호텔 직원들이 각자 짐을 싸서 전달하겠다고 한다.


솔직히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본사는 계속
어떻게든 진행하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제 캐리어는 위탁 수하물인데,
지금 방에 꺼내져 있는 아이패드랑 보조배터리는 어떻게 할 건데요?”


위탁 수하물 안에는
그런 걸 넣을 수 없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걸 따로 챙겨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계속 물었다.


“그럼 그건 누가 챙겨요?
없어지면 누가 책임져요?


그걸 누구 것인지 정확히 어떻게 구분해서

어떻게 다시 나눠줄 건지
저한테 정확히 설명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동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랬더니
본사 직원이 말했다.


“어라.. 그걸 생각을 못 했네?”


나는 그 말을 듣고
진짜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걸 생각을 못 했다고?

지금 남의 짐을 대신 싸겠다고 하면서
귀중품 처리는 생각도 안 했다는 건가.


그 순간
더 확실해졌다.


아, 이건
내가 끝까지 챙겨야 하는 일이구나.


나중에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방법을 정리해 왔다는 식이다.


아이패드나 보조배터리처럼
위탁 수하물에 넣을 수 없는 물건들은
각자 이름, 룸 넘버, 스태프 넘버가 적힌
플라스틱 백에 따로 넣어서
분실 위험 없이
개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계속 물었다.


“Are you sure?”
“Are you sure?”


몇 번을 확인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이미 호텔을 나간 세연이에게 연락이 닿았다.

나는 세연이에게 부탁했다.


내 짐을 대신 좀 챙겨주고,
아이패드랑 보조배터리는
헷갈리지 않게 한 곳에 모아서
책상 위에 올려달라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상황이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침이 되자
한국인 승무원 언니에게 메시지가 온다.


“밖에 나가볼래?”


솔직히
호텔에 계속 있는 것도 괴로웠다.


문을 열고 나가
언니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웃긴 일이 하나 있었다.


문제는
언니에게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혹시 데드헤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트롤리에 캐주얼 옷 하나쯤은 넣어 다녔다.
그래서 그날은
슬랙스에 셔츠를 입고 나왔다.


그런데 언니는
정말 입을 옷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기내 서비스할 때 입는 다이닝 자켓을 입고,
기내에서 신는 구두를 신고,
머리는 유니폼 곱창밴드로 대충 묶은 채

호텔을 나선 것이다.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섰을 때
언니가 자기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나 좀 웃기지 않아?”


솔직히
웃겼다.


그래서 나는 장난으로 말했다.


“언니 지금 약간… 변태 같아.”


언니는 다시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야 근데 나 지금

박명수 닮은 것 같지 않아?”


나는 대충 넘겼다.


“에이, 무슨 박명수야.”


근데 거울을 다시 보는 순간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


잠깐만.


진짜 왜 박명수지?


정말 이상했다.
눈이 닮은 것도 아니고
코가 닮은 것도 아닌데

거울 앞에 서있는 언니의
전체적인 기운이 너무 그쪽이었다.



더 웃긴 건
언니는 원래 정말 단아한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채용 면접 때
회사를 대표해서 가는 언니니까
늘 반듯하고 화사한 언니였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 그날 아침
다이닝 자켓에 기내 구두 차림으로
호텔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박명수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 건데,


언니는 내 표정을 보더니
바로 눈치를 챘다.


“야, 솔직하게 말해.”


그리고 덧붙였다.


“나 이런 말 자주 들어.”


나는 결국 웃음을 못 참고 말했다.


“언니... 평소엔 아닌데
오늘은 좀 있다.
아니 진짜 왜 있지?”


언니도 결국 빵 터졌고,
나도 그 옆에서 같이 웃었다.


지금도 나는
그날 엘리베이터 거울 앞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캄보디아 거리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였다.


동남아시아 같은 분위기인데
묘하게 거리와 사람들이 차갑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 곳곳을 다녔음에도

외국에서 캄보디아인을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근처 중국 음식점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인 우리 둘을 보자

약간의 비명을 지르며

직원들끼리 응대를 서로 미루는 모습을 보이며

불편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매우 불쾌했던 경험이다.


언니에게 메뉴판 뒤에 숨어 말했다.


“아무리 불편해도 그렇지..

귀신 본거 마냥 무안하게 왜 저래?

우리도 번역기 써서 보여줄 건데, 그렇지?”


언니는 눈치를 보며 끄덕인다.


그래도
생각보다 음식은 괜찮았다.


밥을 먹고
근처를 조금 돌아다니다

왓슨스를 발견한다.


안에 들어가 보니
한국 화장품이 정말 많다.
낯선 나라에서
익숙한 브랜드를 보는 일은
이상하게 반갑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여전히 리셉션에서는
비행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며 고개를 젓는다.
언제 출근해야 하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는 돌아가는 비행을
데드헤딩으로 타게 된 거다.


다른 팀이
그 비행을 오퍼레이팅 하고,
우리는 승객으로
그 비행기를 타는 것


그 말을 듣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기로 한다.


나는 대충 씻는 걸 포기한 채
그대로 잠든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전화가 울린다.


나는 당연히

웨이크업콜인 줄 알았다.
보통 출근 한 시간 전에
오는 전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화를 받았다.


리셉션이다.


“20분 후 출발입니다.”


나는 그대로
어버버 한다.



"20분?"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그날 나는
정말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한다.




머리는 대충 묶고,
유니폼은 구겨진 채 입고,
거의 대피한 사람처럼
로비에 내려갔다.


로비에 내려와서 둘러보니

외국 승무원들도 분명
똑같이 20분을 받았을 텐데,
우리 둘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는 점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그런지
뭘 따로 하지 않아도
머리만 슬릭번으로 묶으면
묘하게 준비를 다 끝낸 사람 아니던가


반면 한국인인 우리 둘은
분칠을 안 하는 순간
피곤함이랑 꼬질함이 너무 정직하게 올라왔다.


같은 20분인데
누구는 미니멀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누구는 방금 전쟁터에 강제징집으로 끌려 나온 사람이다.



나는 외국인 승무원들에게 물었다.


“아니, 너네는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준비를 다 하고
이렇게 일찍 내려왔어?”


그러자 외국 승무원들이
너무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야, 너도 너무 잘 준비했어.”


‘Excuse me? 아니
지금 우리 둘 상태가
누가 봐도 방금 긴급 대피하고 내려온 사람들인데?’



그래도 또
우리 동료들은 늘 그런 식이다.

괜히 민망하게 만들지 않고,
상대가 초라해 보이지 않게
꼭 다정하게 한마디 해준다.


‘참.. 진심은 아닐 거지만.. 따뜻한 아이들’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데드헤딩 승무원으로 일반 손님보다 먼저 탑승했을 때
그날 비행을 오퍼레이팅 하는 다른 팀이
우리에게 물었다.


“괜찮아? 도대체 너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잠시 뒤
호텔 직원과 지상 직원들이 올라와
아이패드와 보조배터리를 포함한
따로 분리된 귀중품들을
각자 룸 넘버와 스태프 넘버에 맞게
정확히 전달해 줬다.



내 것도
문제없이 돌아왔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우리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그 사건 이후
회사 내에서는

우리 비행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이 모두에게 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공 비행은

여전히 인기 노선이다.


나는
한동안 사이공 비행을 신청하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그 언니는 그 이후로도
승무원 남자친구와 사이공 비행을

거의 매달 신청했다.


나는 그때마다 언니의 인⭐️에 답장을 보낸다.


“언니는 진짜
또 캄보디아 갇혀봐야 정신 차리겠다.”


그러면 언니는 늘 웃으며 대답한다.


“에이, 설마 또 가겠어ㅋㅋㅋㅋ?”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가끔 이런 식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시에서,
예상하지 못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황당한 하루 속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걸 배우기도 한다.


회사가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해서
무조건 쫄 필요는 없다.


내 권리는
내가 지켜야 하고,
내 물건도
내가 지켜야 한다.


그날 나는
그걸 아주 피곤하고,
아주 황당하고,
아주 웃긴 방식으로 배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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