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회사는 연차수당 대신 연차휴가를 전부 사용하도록 하는 추세다. 근무년수가 26년인 나는, 연간 25일의 연차가 발생해 매달 이틀 이상 휴가를 써해야만 하는 사정인 것이다.
한때는 모름지기 휴가라고 하면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고,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보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휴가기간에 어울릴 만한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곤 했었다. 하지만 연간 25일의 연차뿐만 아니라 주말과 각종 국경일 등의 일수를 따져보면 예전보다 쉬는 날이 상당히 늘어난 지금은, 휴가라는 의미가 그렇게 소중한 느낌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배 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과 사정이라고만 해두자.
아무튼 오늘부터 휴가가 시작되었다. 오늘과 내일, 이틀간의 연차와 광복절과 주말을 포함하면 5일을 쉬게 되는, 제법 긴 연휴지만 딱히 어떤 계획이나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휴가라고 해도 아이들이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가족여행을 떠나는 것이 녹록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휴가의 첫날, 평소보다 1시간가량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은 뒤 아들 녀석을 학교로 태워주고, 집 앞 도서관에 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소소한 계획은 늘 생각해 두는 편이다. 오늘의 계획을 말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오전에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며칠 전에 주문한 엠마뉘엘 카레르의 소설 '적'을 읽을 생각이다. 그제 밤, 이 책의 도입부를 몇 장 넘기자 완전히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무더운 여름엔 너무 무거운 내용보다 조금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이 당긴다.
휴일이나 주말이면 점심은 아내와 함께 가벼운 외식을 한다. 특별히 정해둔 메뉴 같은 것은 없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가격대가 부담 없는 단골식당 중에서 고르는 편이다. 보통 비빔밥, 김치찌개, 냉면, 국수, 두부찌개, 추어탕, 뼈다귀해장국, 돼지국밥, 짜장면, 멸치쌈밥 등이 후보로 오른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아내에게서 점심은 뭘로 할 생각이냐는 문자가 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수영장으로 향한다. 오늘내일은 평영 발차기를 교정할 생각이다. 다른 영법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데, 20년 넘게 수영을 했음에도 유독 평영 발차기는 고질적인 문제를 보였다. 이번 휴가동안 평영 발차기를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교정할 생각이다.
수영을 마치고 나면 하교 시간에 맞춰 아들을 픽업해 이비인후과로 가야 한다. 지난주 아들이 비염 수술을 했는데, 때마침 휴가고 오후엔 비가 올지도 모르니,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라는 아내의 은근한 압력이 있었다. 아내의 진지한 표정과 분위기를 보고는 두 말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중년이 된 이제는 되도록이면 아내의 말을 따르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 처신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하게 든다.
병원에 간 김에 같은 빌딩에 있는 안과에 들러볼 생각이다. 수년 전부터 노안이 진행됐고, 특히 오른쪽 눈은 난시가 심해지고 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 외출을 하는 것은 눈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잠깐이라도 외출을 하려면 선글라스부터 챙긴다. 아무래도 백내장이 의심된다. 이번에 검사를 받아보고 대책을 강구해야겠다. 온몸 구석구석 늙어 가고 있다는 걸 매일 자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3시 30분경에 수업이 끝난다고 했으니까, 학교 앞에서 아들을 태우고 병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얼추 5시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도서관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보다가 7시경에 집으로 와 저녁을 먹을 생각이다. 저녁 메뉴는 카레와 오븐에 구운 치킨너겟이라고 아내가 오전에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즉시 문자로 '네!'라는 짧고도 순종적인 답장을 보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넷플릭스나 쿠팡 플레이에서 적당한 영화를 찾아서 '느린마을 막걸리'에 적당한 안주를 놓고,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가만가만, 안주는 뭐가 좋을까. 주종이 막걸리라면 부추찌짐 아니면 떡볶이에 순대가 어울리겠지. 흐흐. 이걸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술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당한 술과 안주를 떠올릴 때면 주당이라도 된 것처럼 뭔가 그럴듯해진다.
삶이란, 보고 먹고 마시다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면 가까운 누군가와 수다를 떠는 것이 다가 아닐까. 그러다 가끔은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는 재미겠지. 그래, 인생이 뭐 특별할 것이 있나. 보고 먹고 떠들고, 자고 일어나는 게 전부일지도.
오늘 밤, 막걸리 한두 잔에 느슨하게 풀어진 채로 넷플릭스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라도 들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내가 한심하다는 듯 웃음 섞인 핀잔을 휙 날리겠지... 그러면 나는 비몽사몽 비척거리며 침대로 올라가 다시 잠을 자는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 눈을 뜨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는 거지. 아침을 먹고 도서관으로, 점심을 먹고 수영장으로 다시 도서관으로,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앞으로, 그러다가 침대로 가는 일정인 거지.
아차차! 시계를 보니 그새 12시가 넘어 버렸다.
아내가 기다린다. 아직 조금은 귀여운, 그러나 조금씩 무서워지고 있는 마눌님이 '점심을' 기다린다. 이번에도 늦으면 안 된다. 지난번 점심약속에 5분 늦었다가 아내의 날카로운 역정을 들어야만 했다. 서둘러 노트북을 끄고 성큼성큼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차 안에서 아내가 샐쭉거리며 말한다.
"아침부터 자꾸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네. 휴가라서 기분이 좋은 가봐."
"응? 내가 그랬나?"
속마음은 숨길 수가 없나 보다. 별다른 계획이 없다 해도, 휴가는 역시 휴가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