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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elle Jun 14. 2022

나의 열등감을 마주하는 것


길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수만 가지의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 그중 가장 못난 것은 열등감이 아닐까 싶다. 가장 원초적이면서 너도 느끼고 나도 느끼는 감정이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 음지에 못나게 숨어있는 감정. 나는 내가 느끼는 그 비린내 나는 감정이 열등감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열등감 따위 없는 당당하고 쿨한 여성으로 나를 한껏 치장하고 열등감에 휩싸인 타인들을 내려다봤다. 내가 만든 포장지 속에서 나는 대단한 선민의식을 발휘해 오히려 타인들에게 관대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 자체만으로도 충분해. 하지만 오만방자하게도 나에게만큼은 완벽을 요했다.


돌이켜보면 열등감으로 저질러버린 못난 행동들이 너무 많다. 나보다 잘나가는 친구를 보면 괜히 꼬투리 하나라도 잡아 안 그런 척하며 깎아내리고,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긴커녕 질투하며 이루지 못한 나에게 분노하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정신승리도 여러 번 했더랬다. 평생을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온 나에겐 모두가 경쟁 상대였다. 하지만 이를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내가 지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 꼴이 우스워진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이제서야 깨달았다. 열등감은 음식물 쓰레기처럼 꽁꽁 싸맬수록 새어 나오기 마련이고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열등감은 그 악취가 사방에 진동을 한다.


열등감을 동기부여로 사용하라고 하던데 그렇게 살다가 정신병원에 갔다. 공부하고 회사 업무만 하던 시절에는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들렸던 말이다. 공부와 업무는 내 노력 안에서 결과가 컨트롤 가능한 일이니까. 성적에 열등감이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른다. 업무적으로 열등감이 있어 일을 열심히 하면 업무 능력이 오른다. 여기까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결과를 컨트롤할 수 없는 목표와 마주하게 되면 열등감은 동기부여는커녕 불씨가 지펴진 정신병을 캠프파이어로 만들어 줄 장작밖에 되지 않는다.


나의 경우 유튜브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주식, 코인, 부동산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지? 정말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업로드 횟수도 적고 영상 퀄리티도 낮은데 구독자 수 많고 조회 수도 잘 나오는 유튜버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처절한 분노까지 경험하게 된다. 내가 못생겨서? 내 목소리가 이상해서? 내가 재미없어서? 그렇게 끊임없이 나의 부족한 점을 검열하고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다 보면 못나디 못난 열등감이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하지만 난 남들과 다르니까! 난 이 열등감까지 동기부여로 사용하는 멋진 여자라는 포장지에 도취돼 내 스스로를 말 그대로 갈아 넣어 오히려 최선을 다해 영상을 업로드했다. 그래도 안 오른다. 오히려 떨어진다. 작년 한 해 나에게 무한 반복된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난 열등감의 소용돌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해 결국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얻었다. 열등감을 동기부여로 사용하라는 말도 이제 옛날 말이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직업과 목표는 다양해졌다. 노력만 하면 되는 세상에서 나고 자라 노력으로 안 되는 걸 해야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에서 어른이 되었다.


열등감이 나에게 동기부여가 아닌 정신병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열등감과 직면해야 했다. 마음 깊이 존재하는 줄 알면서도 애써 모른척해온 그 찝찝한 감정을 스스로 열어보자니 단전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구태여 꺼내본 내 열등감은 어린 시절 내가 받아온 상처들과 그 상처를 덮어버리기 위해 내가 상처 준 사람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을 바득바득 내 위치로 끌어내리면 그제서야 내 열등감은 안심을 했다. 현실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은 여전히 저 위에서 빛나고 있고 초라한 나는 저 아래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덩어리져있었다. 참 못났다 고은아. 그런데 어쩌겠니 이런 나도 나인데.


열등감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열등감의 대상을 번번이 짓누르거나 열등감 자체를 포용하거나.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으니 나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시작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삶의 마지막 날까지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겠지만 깨달은 지금 이 순간부터 우선 시작은 해보기로 다짐했다. 나는 마주하기 끔찍하게 싫었던 나의 열등감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어떠한 감정도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몸에 튼살이 많아 매끈한 살을 가진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허벅지가 얇은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얼굴에 패인 흉터가 있어 피부가 좋은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목소리가 예쁜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집이 잘사는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조회 수가 잘 나오는 유튜버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 사랑받은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나는 패션 센스가 좋은 사람에게 열등감이 있어.

...


나의 열등감 리스트를 작성하자면 밑도 끝도 없다. 하지만 이를 혼자 꽁꽁 감춰두고 부정하는 데에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이렇게 내 안의 열등감을 하나씩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애매하게 나를 불편하게 하던 재채기를 시원하게 한 듯 맥이 탁 풀리면서 생전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어떤 오션뷰도 나에게 주지 못한 해방감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 대놓고 내 튼살 사진도 적나라하게 올렸다 (반응은 반반이었지만). 그래 나 열등감 있어. 인정해. 괜찮진 않지만 어쨌든 있어. 나 부족한 사람이야. 노력할게.


척, 척, 척. 척은 그만하고 싶다. 나는 남들과 다른 척, 나는 아닌 척, 나는 괜찮은 척. 이제 내 안의 열등감과 그만 싸우고 백기를 들 때다. 내 인생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다. 내가 행복한 것. 이 열등감들은 나를 전혀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열등감의 대상을 아무리 깎아내려 봤자 쾌락은 잠시이고 남는 건 여전히 밑바닥에서 그대로인 나 자신과 공허함뿐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됐다. 이제 정말 행복해질 때가 됐다.


나의 행복은 오로지 나로부터 온다. 외부에서 오는 행복은 그 정도가 클 수는 있으나 반드시 유통기한이 있기 마련이고 마찬가지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나의 행복을 외부에 위탁해선 안 된다. 내가 스스로 행복할 줄 알아야 비로소 지속 가능하고 온전한 내 행복이 완성된다. 내 행복의 첫걸음은 못난 나 또한 포용하는 것이다. 나는 많이 부족하고 많이 못났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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