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커튼 앞에서_티노 세갈 전시회

by 채 수창

"티노 세갈은 어떠한 기록이나 물질적 오브제도 생산하지 않는 비물질적 작업을 전개합니다. 신체와 언어, 그리고 관계를 매개로 형성되는 그의 작품은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 불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거나 말을 건네는 ‘해석자(interpreters)’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현됩니다.


이번 전시는 신작을 포함한 8점의 구성된 상황과 함께 작가가 직접 선별한 리움미술관의 조각 소장품을 선보입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은 작가의 대표작 ⟨키스⟩(2002)의 예술적 원천으로서 특별한 대화를 형성하며, 조각의 역사적 맥락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동시에 곳곳에 배치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비즈 커튼은 공간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됩니다. 작가가 엄격히 규정한 비즈의 색상과 배열 순서에 따라 매번 새롭게 현현하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커튼 작업은, 구전으로 전달되는 몸짓과 말을 반복 수행하며 실현되는 세갈의 실천과 미학적 궤를 같이합니다.


관객은 조각과 눈을 맞추고 비즈 사이를 지나 해석자들과 마주하고, 이 무형의 상황을 작동시키는 일부가 되어갑니다. 일체의 기록을 거부하는 티노 세갈의 전시는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는 시대에 전자 매체를 통하지 않는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재고하게 합니다. 오직 관객의 기억과 경험 속에만 남게 될 이 순간들은 인간적 유대와 감각을 통해 빚어지는 예술의 가치를 깊이 있게 전달할 것입니다." <리움 미술관 전시 안내문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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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커튼 앞에서 멈춰 섰다.


초록색과 검정색 구슬들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손을 내밀면 부드럽게 헤치고 지나갈 수 있는, 그저 얇은 막이었다. ‘해석자’라 불리는 누군가가 커튼 너머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아주 낮은 노랫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뒤돌아 섰다. 그게 내 한계였던 건지 아니면 내가 일부러 선택한 건지 잘 모르겠다.


티노 세갈은 어떠한 물질도 남기지 않는다. 카탈로그도 없고, 작품 라벨도 붙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오롯이 사람의 몸과 목소리로만 이루어지며, 전시가 끝나면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 자체가 작업의 조건이다. ‘관객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다’는 말을 증명할 방법도, 기록할 길도 없다.


나는 예술에 대한 지식이 제법 쌓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제 그 비즈 커튼 앞에서는 쉽사리 손을 밀어 넣지 못했다. 내가 가진 지식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 걸까, 아니면 어떤 것이 부족해서였을까?


현대미술은 표현 매체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허문다. 세갈의 ‘구성된 상황’이 로댕의 청동 조각 옆에 놓인 건, 기획자의 의도가 담긴 선택이다. 단단하게 굳은 물질과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몸, 시대를 뛰어넘어 이어져 온 조각의 동작과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제스처, 이 둘의 충돌이 오히려 전시의 본질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글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커튼 안으로 발을 들이진 못했다. 생각으로 아는 것과 온몸으로 직접 마주치는 것 사이의 간격이, 어제의 그 비즈 커튼 폭만큼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 사진은 어디쯤에 서 있을까?


우리는 오랫동안 사진을 기록의 수단으로 써왔다. 순간을 포착해, 세상을 한 컷의 이미지 데이터로 바꿔왔다. 하지만 세갈은 정반대 방향에서 작업한다. 그는 기록 자체를 거부한다. 물질도, 재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전시가 되고, 미술 시장에선 여전히 거래된다. ‘비물질이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라는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 두자.


지금 더 시급한 건 이 물음이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AI가 일어나지 않은 일조차 만드는 시대에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진이 품고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어제 비즈 커튼 너머 들려오던 행위를 이해하지 못 했다. 그 경험은 사진의 영역 밖에 있었다. 그런데, 그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과연 사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사진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걸까? 어쩌면 경계 그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 지금 사진에게 주어진 역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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