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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원 Apr 28. 2020

세면대 배수관 교체기

갑자기 신발을 빨고 싶어 졌다.

신발이 하얘지면 기분도 좋고 줄을 맬 때는 뭔가 정리되는 것 같아 종종 그런다.

그런데 신발을 빨다가 그 밑창에 껌딱지 같은 것이 붙어 있어 이쑤시개로 긁어내었는데 손에서 미끄러져 세면대 배관으로 이쑤시개가 들어갔다.

'세면대 속에 이쑤시개가 있으면 좀 찝찝한데...  배관을 풀어 빼내자'

몽키스패너로 배관을 풀고 그 안에 잔뜩 쌓인 이물질을 거둬 냈는데 이쑤시개가 없다.

'어디 갔지?'

살펴보니 빨려고 세면대에 넣어 둔 하얀 끈, 검은 끈 사이에 이쑤시개가 끼어 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풀어놓은 배관을 조인다. 그런데 뚝.

낡은 배관이 부러져 떨어진다ㅜ

고된 노가다의 시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날 세면대 배관을 사려고 철물점으로 가려는데 마침 아파트에 장이 서는 날이라 이동식 철물점이 있다.

"사장님, 세면대 배관 좀 주세요."

그렇게 세면대 배관을 샀다.

그런데 사장님 왈,

'세면대 낡은 배관을 다 뜯어내고 새 배관을 설치해야 하는데 그러다 세면대가 깨지기도 한다.

세면대 배관 길이가 길 수도 있어 잘라쓸 수도 있다.

그래서 출장 가서 배관 교체설치도 해 준다.'

 "근데 그럼 얼만데요?"

"배관 세트 2만 원이고 설치비는 3만 원입니다."

난 설치비를 세이브하기로 마음먹었다.

출근길에 산거라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내 저녁에 들어가면 집에 남자가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마라는 오만한 내심을 키웠다.

퇴근해서 낡은 배관 일체를 뜯어낸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배관이 물려 있는 속에 이른바 테프론 테이프가 녹아 붙어 서로가 일체형인 양 몽키스패너를 아무리 돌려도 잘 안 풀린다.

결국 큰 딸의 도움을 받아 낡은 배관 일체를 뜯었다.

기쁜 마음으로 새 배관을 설치한다.

그런데 배관이 길어서 하수구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오니 물이 차이고 모양도 희한하다.

와이프 왈, 이게 뭐야? 배관을 어떻게 한 거야?

그제야 비로소 이동식 철물 사장님 말씀이 이해되었다.

'배관을 잘라야 한다'

집에 있는 줄톱을 꺼내 스테인리스 배관 아니 황동 배관을 잘랐다. 아니 자르는 시늉을 했다.

아무리 밀어도 동그란 배관을 톱으로 자르는 건 너무 힘들다.

결국 반짝이는 새 배관에 흠집만 잔뜩 내고 접었다.

그러나 내 내심이 어땠나?

저녁에 들어가면 집에 남자가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마ㅜ

인터넷을 뒤져 배관을 자르는 손도구를 시켰다. 1만 2천 원.

이틀 동안 배관을 깨끗하게 자르는 상상을 했다. 배관을 파이프 절단기 안에 물리고 손으로 양옆을 흔들면 배관이 잘린다.

드디어 파이프 절단기가 왔다.

퇴근하고 보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길고 긴 배관을 풀고 파이프 절단기에 물린다.

그런데 둥근 것이 잘 물리질 않는다. 힘을 꾹 주니 쑥 구부러진다.

'이게 아닌데ㅜ'

망가진 아래쪽 위로 조금씩 다시 절단기에 배관을 구겨 넣는다. 그런데 넣는 족족 잘리는 게 아니라 구겨진다ㅜ

결국 둥글고 미끈했던 배관이 위아래로 구겨졌다.

나의 2만 원짜리 배관이여ㅜ

만신창이가 된 새 배관을 망연자실 쳐다보다,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작은 딸, 막내딸 얼굴이 떠오른다.

집에 남자가 필요한 이유?

사고 치기 위해서지ㅜ

현타가 온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철물점으로 갔다.

"사장님 짧게 잘린 세면대 배관 없나요?"

앗! 둘러보니 많다.

"이게 길이가 짧은 건 내가 다 잘라 논거야."

 'ㅜㅜ'

"얼만가요?"

중국산 주물은 5천 원, 국산 황동은 만 천 원.

더 이상 출혈을 감당키 어려워 중국산을 샀다.

집에 돌아와 다시 설치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배관이 모두 규격 제품이라 만신창이가 된 새 배관의 국산 부속을 빼서 짧은 배관만 빼고 중국산 부속을 대체해서 설치했다.

물을 틀어보니 누수 없이 잘 빠진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ㅜ 법인 세무조정 시즌에 집에서 쉴 일이지 왜 이리 힘을 빼고 있지ㅜ 아니 사고 치고 수습하는 중이지ㅜ

와이프에게 물 한번 틀어보라고 했다.

"응"

"근데 뭐가 바뀐 거야?"

'ㅜㅜ'

기술자가 괜히 필요한 게 아니다.

오래전에 시켰는데 이제야 배송된 미세먼지 마스크로 조그만 위안을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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