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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도령 May 24. 2020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다.

수원화성의 교훈

수원 화성 연무대의 아침은 싱그러웠고 햇빛은 눈이 부셨다.

나는 역사문화 기행에 관심이 많아 수원화성에 여러 번 다녀왔지만 나의 친구들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한 달에 한번 비박을 다니지만 오늘은 사정이 생겨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어려서 여의고,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조선시대 개혁군주다.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 나는 역사문화 해설가로 통한다. 이유는 내가 역사와 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들의 전문 분야는 다르다. 한 친구는 음악과 패션에 일가견이 있으며, 다른 친구는 경제 전문가이다. TV 드라마를 통해 정조의 업적과 시대상황을 많이 보았을 것이니 역사적 사실은 건너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만 역어 보기로 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의 묘(융릉)를 수원으로 모시고 가까이서 관리하기 위해 만든 성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과 궁궐은 여러 차례의 전란(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동란 등)으로 소실되어 복원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원형대로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화성은 이를 건설할 때 만들어진 설계도인 『화성성역 의궤』가 있어 완벽하게 재건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 지어진지 불과 20~30년뿐이 되지 않은 건축물이지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북문이며 정문인 장안문의 북동/서적대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거포는 우리나라 비극의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주족에게 판매한 포로 명나라의 거대 장성이 이 포로 인하여 무너졌고,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에서 옹성전을 벌이던 인조가 산성 문을 나서게 만든 것도 이 포 때문이다. 산성에서 농성을 벌이던 인조는 강화로 보냈던 봉림과 인평대군이 잡혔다는 소식과 건너편 산 위에서 행궁 위로 쏘아대는 홍이포의 위력에 놀라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홍이(紅夷)란 말은 붉은 오랑캐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붉은 기를 들고 다닌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지금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보는 네덜란드 응원단의 모습은 오렌지 빛이다.


팔달산 정상에는 화성장대가 행궁과 시내를 잘 굽어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져 있는데,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모양이 비슷하다. 이 장대의 1층 대들보에는 정조가 군사훈련 장면을 지켜본 후 감회를 읊은 시가 걸려 있는데, 자신의 장용영 군사가 믿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정조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주변에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남편을 잃고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그늘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그의 저서 한중록이 70여 년간 힘든 세월을 말해 준다)

수원화성이 청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이 여러 시설에서 나타나지만 방화수류정과 장안문, 그리고 팔달문 등은 그 정수이다. 방화수류정(亭, 보물 1709호)은 성곽 위에 설치된 망루이면서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자의 역할도 했다. 또한 성의 정북, 정남 문인 장안문, 팔달문은 일반 석재와 동일한 규격의 벽돌로 잘 쌓여 있다.

축성을 하기 위해 정조는 정약용에게 명하여 설계도와 건축도구를 만드는데, 유명한 것이 거중기(擧重器), 녹로(轆轤), 유형거(遊衡車)등이다. 그런데 녹로는 그 모습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크레인과 같고, 유형거는 짐칸의 높이가 바퀴보다 높은 수레로서 면적이 넓은 짐을 바퀴에 걸리지 않고 손쉽게 옮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거중기는 도르래의 물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는 뛰어난 과학성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그 밑으로 옮겨야 기능을 할 수 있는 고정식 기계라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배운 실학자 정약용의 위대한 발명품은 유리장 속의 전시물이었던 것이다.


화성행궁은 평상시 수원 관아로 사용되다가 정조의 행차 시에는 행궁의 역할을 하던 관청으로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낙담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이 없어졌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이 행궁에서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의 환갑잔치를 열었으며, 정문 누각의 이름인 신풍루(新豊樓)는 자신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며, 노래당(堂)은 자신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소 옆에 집을 짓고 살려고 했던 정조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문인 팔달문으로 주변에는 여러 개의 시장이 붙어 맛집과 생활용품 상섬이 성시를 이룬다. 유명한 행궁동의 통닭거리를 비롯해, 지동시장의 순대센터, 만두집들이 즐비하다. 또한 조금만 외각으로 나가면 수원 왕갈비 집들이 많다. 우리는 요즘 핫한 수원의 진미통닭집에서 옛날 통닭을 안주삼아 시원한 맥주로 잠시 목을 축였다. 그러고 나서 한중 우호를 기리며 수원시와 광동성이 협력해 만든 월화원에 잠시 들려 중국식 정원의 모습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없는 정조임에도 사도세자가 그리워 궁궐을 짓고 묘소 옆에서 살기를 원했던 정조의 효심에 비하면 '불효자 보다도 못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하루였다. 혹시 정조는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일까? 아니면 구중궁궐을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시켜서 큰 일을 벌였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역시나 붐볐으며, 차 안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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