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여자애가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건.

상처받을 준비를 미리 한다는 것.

by 캐나다 부자엄마

"할머니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면 억울한 게 뭔지 알아? 나는 시작도 못하고 맨날 지는 싸움만 한다는 거야."


"우리 반에서 오천 원이 없어진 날이 있었어. 선생이란 사람이 우리 보고 책상 위에 올라가서 무릎 꿇고 손들라고 했거든. 누가 가져갔는지 자수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근데 내 옆에서 내 얼굴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나보고 빨리 내놓으라는 듯이. 할머니 내가 진짜 안 가져갔거든. 오천만 원. 오백만 원이면 몰라도 나 오천 원 안 훔쳤거든.


또 한 번은 우리 반 애가 가출했던 날이 있었어. 보겸이라고 걔도 나처럼 맨날 아빠한테 머리채 잡히면서 맞던 앤 데 걔가 아빠한테 골프채로 뚜드려 맞던 날 집을 나갔데. 근데 걔 아빠가 학교에 와서 다짜고짜 나보고 우리 집에 가자는 거야. 내가 여기 산다고 그리고 할머니랑 나랑 여기 산다고 우리 집에 걔를 숨겨놓았다면서. 더 억울한 건 담임이란 사람도 나를 못 믿는 거야. 할머니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게 그런 거야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맨날 지는 거."


"할머니. 나 착하게 살고 싶었어. 다른 여자애들처럼 손으로 입 가리고 웃으면서 애교도 부리면서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거 있잖아. 근데 할머니 나는 이제 너무 영악해졌어. 세상을 다 알아버렸어. 할머니 나는 이제 눈물에서도 회색빛이 나와. 썩었나 봐. 여기 내 속이. 정신 같은 게."


"발버둥 치는 거야. 나는 엄마처럼 아빠처럼은 안 돼야 될 거 아니야. 나는 할머니처럼 80이 다 돼서 손녀라는 년한테 이런 소리 듣지 않고 살고 싶은데 할머니. 나 같은 애는.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 가서 도와달라고 해야 돼? 할머니. 나는 억울하잖아. 망했다고, 안된다고 말하기엔. 그러니까 희망 같은 걸 짓이겨버리기엔 나는 너무 어리잖아요. 난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는데 할머니."


"내가 죽으려고 하는 게 왠지 알아? 잘 살고 싶은데 이번생은 망한 것 같아서. 아무리 용을 쓰고 기를 써봤자 이번생은 쫄딱 망한 거 같아서 다시 시작하려고. 왜 게임 캐릭터도 죽고 나면 다시 살아나잖아. 그럼 다시 처음부터 잘해볼 수 있잖아. 그래서 내가 기를 쓰고 손목을 긋는 거야. 할머니 그러니까 내 손목에 약 같은 거 발라주지 마요.


할머니가 언제부터 나를 챙겼다고 그래. 그리고 후시딘 같은 거 발라봤자 찢어져서 산산조각 난 마음 같은 건 아물지 않는다고. 손목 찢어진 건 꿰매고 약 바르면 그래도 낫잖아. 흉터는 남아도 근데 정말 무서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상처 같은 거야. 할머니 마음에도 그런 거 있잖아. 없다고 거짓말하지 마. 나는 아니까. 노란 고름이 차오르다가 푹 터져버려서 끝내 썩어버리는 마음 안에 있는 상처 같은 거, 나는 그게 포도알처럼 백개고 천 개고 달려있거든, 그러니까 할머니 나는 죽고 싶어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아."


할머니와 아빠가 외출하고 없던 날이었다. 힘든 마음이 하나고 두 개고 푹하고 쓰러지다가 도미노같이 와르르 쏟아지던 날. 집에 들어선 나는 등에 맨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텅 빈 집에서 악을 쓰고 하고 싶은 말을 해댔다. 눈물이 입에 들어가서 짭짤한 맛이 느껴지고 콧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다 달라붙을 때까지 아빠한테 뚜드려 맞던 내 기억 속 울보 엄마의 마지막 얼굴처럼 될 때까지 난 그 자리에서 서럽고 아프게 한참을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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