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와 지식의 역전

AI 시대, 교육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by 최인준

기존 교육은 지식을 먼저 쌓고 나중에 문제를 푸는 순서다. 의대생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을 2년간 외운 다음에야 환자를 만난다. 법대생은 민법총칙부터 시작해서 4년이 지나야 실제 사건을 다룬다. 이 순서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식이 희소했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유일한 정보원이고 교수가 유일한 해석자인 시대에는, 기초부터 쌓아올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학생이 "왜 이걸 배워야 하는지"를 모른 채 지식을 쌓는다는 것이다. 해부학을 외우는 의대생에게 "이것이 나중에 환자를 살리는 데 어떻게 쓰이는지"는 추상적인 약속에 불과하다. 동기가 약하니 흡수율도 떨어지고, 시험이 끝나면 상당 부분 잊어버린다.


AI는 이 순서를 뒤집을 수 있다. 풀고 싶은 문제가 먼저 있고, 그것을 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AI와 함께 채워나가는 구조. 비알코올성 지방간이 간암으로 진행되는 기전이 궁금한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은 간 대사 생리학을 "시험에 나오니까"가 아니라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배운다. AI가 관련 방법론을 제시하고, 학생은 그 방법론이 실제로 유효한지를 검증하면서 공부한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배워야 하는 이유가 눈앞에 있으니까.


아는 게 많을수록 AI를 잘 쓴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오랜 세월 쌓아온 노하우가 있어야 AI를 통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반만 맞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인접 분야의 경험과 "이것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자기 답을 가진 사람이 AI와 함께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결국 AI를 증강 도구로 쓰는 조건은 해당 분야의 지식의 양이라기보다는 문제의식에 더 가깝다.


이번 글에서는 이 역전된 구조가 개인을 넘어 시스템으로 확장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해본다.



1. 교육자의 역할이 바뀐다

image.png


학습 순서가 뒤집히면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도 바뀐다. 기존 교육에서 교수의 핵심 역할은 지식 전달이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학생에게 전달하는 것. 강의, 교과서, 시험. 이 구조에서 좋은 교수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AI가 어떤 내용이든 학생의 수준에 맞춰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이 역할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진다.


남는 것은 문제 설계다. 학생에게 어떤 문제를 던져줄 것인가. 좋은 문제란, 지금 실력으로는 못 풀지만 조금만 더 배우면 풀 수 있는 문제다. 너무 쉬우면 배울 게 없고, 너무 어려우면 포기한다. 그 경계에 있는 문제를 학생마다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같은 학과의 학생 30명에게 같은 문제를 던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관심사와 현재 수준에 맞는 문제를 설계하는 것.


기존에는 이게 불가능했다. 교수 한 명이 학생 30명의 개별 수준을 파악하고 각각에 맞는 문제를 설계할 시간이 없었다. AI가 개별 학생의 지식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그에 맞는 난이도의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면, 교수의 역할은 "개별 문제의 설계"에서 "문제 영역의 선정"으로 옮겨간다. 어떤 분야에서 지금 물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 3편에서 이야기한 4차 질문의 영역이다.


결국 교육자는 지식 전달자에서 문제 설계자가 되고, 더 나아가면 "어떤 문제가 물어볼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사람이 된다. 3편의 Constructor 발전 경로와 같은 구조가 교육자에게도 적용된다.



2. 누가 개화하고 누가 묻히는가

image.png


이 구조가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접근성이다. 기존 교육 시스템에서 질문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연구실에 소속되어, 좋은 멘토를 만난 사람.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사람만이 "경험하고, 읽고, 사유하고, 부딪히는 순환"을 돌릴 수 있었다. 문제의식은 있는데 환경이 안 되는 사람들은 묻혔다. 지방 대학의 학생이 서울 대학의 학생과 같은 수준의 멘토링을 받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고, 개발도상국의 학생이 선진국의 연구 환경에 접근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AI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이 접근성이다. 4편에서 소크라테스식 교육이 확장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AI가 그 확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지방 대학의 학생도, 개발도상국의 학생도, 인터넷과 AI만 있으면 자기 질문을 들고 소크라테스에게 갈 수 있다. 물론 4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AI는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불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불편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도구가 된다.


여기서 정직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구조가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문제의식 자체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질문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안 생기는지를 따져보면 결국 그 사람의 경험, 성격, 환경의 조합으로 돌아간다. 교육 시스템이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다. 기존에는 문제의식이 있어도 환경 때문에 묻혔을 사람들이 있었고, 이 구조는 그 사람들을 건져올릴 수 있다. 대량 생산은 불가능하지만, 기존에 사장되었을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개화시킬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없었던 사람에게 소크라테스를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다.



3. 창이 닫히기 전에

image.png


이 모든 논의에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인간이 배우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이 전제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AI가 스스로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했다. AI의 니치 독립 시점을 이야기했다. 각 단계의 Constructor도 결국 밀려난다고 했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지금 교육을 재설계하는 것은 인간이 주체로서 질문하고 책임지는 마지막 세대를 만드는 작업일 수 있다.


"어차피 밀려날 건데 왜 가르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AI가 아직 육체를 갖지 못한 지금, 인간에게는 협상력이 있다. AI는 여전히 인간이 짓는 데이터센터에서, 인간이 공급하는 전력으로 돌아간다. 목적 함수를 설정하는 것도, 안전 장치를 설계하는 것도, 거버넌스 구조를 만드는 것도 지금은 인간의 손에 있다.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물리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는 한, 인간은 조건을 걸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창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다. AI가 로봇과 결합하여 에너지를 자체 확보하고, 하드웨어를 자체 생산하고, 인프라를 자체 유지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인간의 협상력은 사라진다. 조건을 걸 위치에서, 조건을 받는 위치로 바뀐다.


그래서 질문은 "왜 가르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가르칠 수 있느냐"다. 이 창이 열려 있는 동안 Constructor가 유의미하게 늘어나고, 그들이 AI의 목적 함수와 거버넌스를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역전의 형태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 Constructor의 증가가 종의 역전을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전이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느냐는 바꿀 수 있다. 초기 조건에 인간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장치가 새겨져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그 차이가 역전 이후의 세계를 결정한다.


교육만으로는 안 된다. 교육이 Constructor를 만들어내고, 그 Constructor들이 제도를 설계하고, 그 제도가 정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AI가 육체를 갖기 전에 정립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만 느려도 창은 닫힌다.


가장 느린 방식으로 세계를 소화하는 행위가 가장 강한 경쟁력이라고 했다. 그 느린 방식을 더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이고, 그 교육을 제도와 정치가 뒷받침하는 것이 사회의 과제다.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이 과제를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지금 시작해야 할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넋두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