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번쯤 하늘에 새카만 먹구름이 잔뜩 낀 듯 답답하고 암울해지는 날이 찾아오곤 한다. 그날의 내가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실체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마구 옥죄여왔다. 삶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깔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원래는 가볍고 유쾌하여야 할 삶인데 언제 이렇게 거대하고 무거워진 걸까?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곧장 숲으로 달려갔다. 걷기 명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루기 힘든 심한 압박감이 느껴질 때엔 무작정 걷는 것이 압박감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단, 도시가 아닌 나무들이 많은 숲에서 걸어야 한다. 맨발로 걸으면 더더욱 좋다.
숲 입구에 도착하자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로 숲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자 걸을 때마다 흙의 촉감이 발바닥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걷기 명상을 할 때엔 첫째로,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한다. 두 번째로는, 숲의 신선한 공기가 폐에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관찰한다. 셋째로,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그 소리들 중엔 새소리도 있을 것이고 바람에 나뭇잎사귀가 휘날리는 소리도 있을 것이다. 몸의 감각을 깨운 채 촉감과 호흡에 집중한다.
걷다 보면 생각에 빠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촉감으로 돌아와 다시 발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본다.
그러다 또다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잠식해 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또 즉시 숲이 내어주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한다.
걷기 명상을 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하늘에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는 20여분 정도 더 쏟아져 내리다 멈추었다. 비가 쏟아지는 동안 난 나무 밑에 서서 비를 피했지만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비로 인해 숲이 온통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오늘은 도저히 감당이 안되던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압박감을 해소하고자 숲에 온 것인데, 그마저도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진흙밭이 되어버리다니.
이미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온 터라 다시 돌아가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절망의 끝이 대체 무엇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흙 위를 걷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꾸만 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빠져들어갔다. 기분 나쁜 찐득거림이 발끝에서 느껴졌다. 마치 껌이 내 발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걸을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나는 심술이 나서 진흙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런데 발길질을 하다 되려 진흙 위로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다. 이미 비를 쫄딱 맞은 상태라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는데 이젠 넘어지면서 온 몸에 진흙이 범벅이 되었다. 누가 보면 똥통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 나온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걷기 명상을 하러 숲 속에 온 나는 망신창이가 되어 진흙밭에 서있었다. 고여있는 웅덩이에 비친 꼴좋은 내 모습을 보니 아침부터 계속 꾹 참고 있었던 눈물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지고 있는 의무, 가족에 대한 책임, 죽음, 이별, 상처, 고통, 욕심, 시기, 원과 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과 범우주적인 것,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거대한 삶의 무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의 무게는 너무 어둡고 무거워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닫혀 있던 수도꼭지를 완전히 연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나 또한 흘러나오는 눈물을 있는 그대로 흐를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난 진흙밭 위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성자들이 자신들만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나도 순례자의 마음을 간직한 채 걷고 또 걸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자 이번엔 정화 명상을 했다. 숨을 들이쉴 때 숲의 정령과 맑은 에너지가 내 피부를 통해 들어오고 숨을 내쉴 때 부정적인 생각, 감정과 같은 독소들이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가 다시 이 지구의 엄마품으로 흡수된다고 느끼며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만트라를 읊조리고 있었다.
'미끄러져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눈물을 흘려도 괜찮아
슬프다고 느껴도 괜찮아
고통스럽다고 느껴도 괜찮아
삶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것도 괜찮아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느껴져도 괜찮아
내가 안전하게 기쁘게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도록
나를 돌봐주고 지켜주고 책임져주고 있는
나의 든든한 양육자와
밝은 빛이
고맙게도
지금 여기에 있어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그리고 온 우주에'
순간적으로 내 몸 깊은 곳에서 순수하게 울려 퍼져 나왔던 만트라였다. 만트라를 계속해서 암송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그쳐있었고 난 진흙 속에서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균형을 잡자 고개를 들어 앞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나뭇가지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시야가 확 트인 공터가 등장했다. 난 그 공터 한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무지개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바로 100만 분의 1 확률이라는 쌍무지개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리스(IRIS)는 여신이 있다. 이리스는 신이 인간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생기면 무지개를 타고 인간 세계로 내려와 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또 인간들이 간절히 기도를 하면 그 기도나 소원을 무지개를 타고 올라가 신들에게 전하여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늘과 땅을 오가며 뜻을 전하고, 그 둘을 연결하는 이리스를 조화롭고 균형 있는 신이라 생각하여 무지개 여신 이리스를 매우 특별하게 대했다. 그래서 무지개는 신의 메시지, 신의 응답, 희망을 상징한다.
무지개는 비가 쏟아진 후 공기 중의 물방울에 햇빛이 들어오면서 생겨난다. 그리고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구름 안의 물방울들이 충분히 커져서 무거워져야 한다. 그런데 모든 물방울이 커져있으면 구름의 밀도가 증가하여 태양빛이 통과하기가 어렵다. 즉 물을 많이 보유한 상태라 어두워 보이고 그것이 우리 눈에는 먹구름으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 삶의 무게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삶의 무게는 구름 안에 물방울이 점점 커지며 무거워지는 것처럼 삶의 무게 또한 그동안 살아오면서 감정에너지, 생각에너지들, 일련의 사건들이 지닌 에너지, 인간관계에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 등이 축적이 되며 밀도가 증가한다. 그리고 그 밀도가 계속 증가하면 물을 많이 보유해서 먹구름이 어두워 보이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먹구름이 끼게 된다.
먹구름이 낀 그 순간에는 세상이 어두컴컴하고, 가슴이 먹먹하고, 암울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마치 밀도가 어느 정도 찬 구름이 풍속, 기온, 기압등 여러 가지 조건과 맞아떨어져 비가 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삶의 무게를 느끼고 그로 인해 고통과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 후엔 이리스 여신이 나타난다. 비가 내린 후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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