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었다. 소리 명상에 대해 좀 더 깊이 배우고자 찾아온 이 학교에선 온 세상이 침묵에 잠긴 고요한 새벽에 첫 수업이 시작된다. 벌써 몇 주째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바쁜 일정에 몹시 피곤했는지 오늘은 알람소리도 못 듣고 늦잠을 자버렸다.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 난 눈곱도 안 떼고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갔다.
교실에 들어서니 여느 때처럼 교실 한가운데에 놓인 초가 어스레한 방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미 모두가 원을 그리며 앉아 명상에 잠겨있던 터라 나는 발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어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세상도, 교실도 모두가 고요한 와중에 내 머릿속만은 온갖 생각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수업이 진행되는 곳은 어디였지?'
'점심엔 뭐 먹지? 그냥 학교 근처에서 사 먹을까? 아니면 집에 가서 요리해 먹을까?'
'냉장고에 뭐가 있었더라?'
'오늘 과제 발표 준비는 점심 먹고 나서 해야겠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친구랑 저녁 약속은 그냥 취소할까?'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조금이나마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빠질 수록 해야 할 일들은 점 점 더 늘어만 갔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얼른 점심만 챙겨 먹고 곧장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반얀나무 밑에 앉아서 과제를 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 문부터 활짝 열었다. 그리고 샐러드를 만들 채소 몇 가지를 꺼내 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집주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금 혹시 집에 있나요?"
"네 점심시간이라 밥 먹으려고 잠깐 집에 왔어요. 무슨 일이시죠?"
"10분 정도 뒤에 사람들이 갈 텐데 집 좀 보여 줄 수 있나요?"
"오 맙소사.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저 오늘 진짜 바쁘단 말이에요!"
샐러드만 만들어 먹고 곧장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우리 집에 누가 온다니! 학교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 터라 이 집에서 지낼 날도 이제 한 달도 남지 않긴 했었다. 그래서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공고를 내었고 집을 보러 온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지금 바로! 근데 왜 하필이면 지금이어야 했는가! 가뜩이나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겐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아.. 그냥 학교 근처에서 사 먹을걸. 아니 그냥 전화를 받지 말걸.' 온갖 후회가 몰려왔다. 방 안을 둘러보니 아침에 늦잠을 자서 급하게 나가느라 이불이랑 옷가지 방 안에 어질러져 있었다. 갑자기 불쑥 찾아온 이 불청객으로 인해 온갖 짜증을 내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이불이랑 옷가지들을 옷장에 꾸겨 넣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속사포로 이루어졌다. 빨리 점심을 만들어 먹고 학교로 돌아가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엌으로 돌아왔다. 아까 냉장고에서 꺼낸 채소들을 썰어 샐러드를 만들려고 도마에 다가가는 그 순간.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경끼를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거대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출몰한 것이다. 그것도 내 도마 바로 옆에!! 나름 깨끗하게 잘 관리가 된 집이라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지금까지 벌레랑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불청객들이 퍼레이드 하는 날인가 보군!'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한담... 작은 벌레라면 혼자서 어떻게 해볼 텐데 저건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몸길이의 두 배 정도 보이는 저 더듬이로 내 도마를 더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소름이 촤르르르륵 끼쳤다.
나도 바퀴벌레도 우리 둘 다 일단은 움직임을 멈췄다. 말 그대로 얼음이었다. 나의 쿵쾅 소리는 심장소리 외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 순간.
"똑똑"
누군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바로 내가 왜 하필 이때 오냐며 짜증을 부렸던 그 불청객이었다. 나는 그 불청객을 보자마자 '캔 유 플리즈 헬프 미?'라고 외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파란 눈을 가진 그 불청객은 나를 따라 부엌에 갔고 도마 옆에 있던 바퀴벌레를 잡아주었다.
불과 몇 초 만에 불청객은 순식간에 내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자 멋진 영웅으로 변하였다.
인생은 새옹지마이다. 개인적으로 새옹지마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오래전 중국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하얀 말이 멀리 달아나 버려 노인은 키우던 말을 잃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세상에 어떻게 운이 저렇게나 나쁠 수 있냐며 노인을 위로했다.
“하얀 말을 잃어버렸다면서요? 너무 속이 상하시겠어요.”
하지만 노인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허허.”
얼마 후 노인의 하얀 말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멋진 검은 말과 함께 왔다.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냐며 다들 부러워했다.
하지만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허허..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며칠 후 노인의 아들이 새로 온 검은 말을 타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나 어떻게 저렇게 운이 나쁠 수가 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허허.”
그 노인은 노인의 삶에 불청객이 찾아오거나 말거나 언제나 한치의 흔들림이 없이 늘 평온한 미소를 유지했다.
노인의 아들이 다리를 다치고 얼마 후 어느 날 나라에 큰 전쟁이 났다. 마을 젊은이들은 모두 징병이 되었고 전쟁터에서 대부분 죽게 되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우리 삶에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인연과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불청객들이 어느 순간엔 귀인으로 바뀌기도 하고, 처음엔 축복이라 여겼던 그 인연이 어느새 악연으로 바뀌어있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사는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화가 되고, 어느 것이 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 순간에 보기에 좋은 일이 생겼다고 호들갑 떨지 않고
그 순간에 보기에 나쁜 일이 생겼다고 슬퍼하지 않고
중국의 노인처럼 늘 평온하고 고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새옹지마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이고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수행하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다.
좋거나 싫거나 하는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삶에 귀인이 찾아오든 불청객이 찾아오든 고른 마음을 유지하려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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