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염소가 물구나무를 선채 풀을 뜯고 있네!" 잠깐, 염소가 원래 물구나무를 섰었나? 나는 헛것을 봤나 싶어서 눈을 비볐다가 떴다.
물구나무 서기를 하던 염소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방금 전 염소는 사막 사파리 투어를 시작하고 나서 몇 시간 만에 처음 나타난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것 외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모래사막이 전부였다. 탄성을 자아내던 서인도 라자스탄의 황금빛 사막은 그 풍경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까 별다른 감흥이 없어져버렸다. 게다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로 온몸의 수분이 전부 다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더 짧은 일정의 사막 사파리 투어도 있었지만 나의 욕심으로 인해 일부러 긴 일정의 투어를 선택했다. 나는 나의 선택을 몹시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인터넷도 안 되는 이 불편한 사막에서 삼일씩이나 더 있어야 한다니! 오 마이 갓!
사막에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휴대폰만 만지작 거렸다. 나를 본 인도인 가이드인 슈밤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여긴 사막이라 휴대폰을 충전할 곳이 없답니다."
신호가 안 잡히는 지역에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배터리가 더 빨리 닳고 있던 터였다. 슈밤의 말을 듣고 나니 배터리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휴대폰 전원을 꺼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슈밤이 이번에는 낙타에서 내려와 좀 걸어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사실 태어나 처음 장시간 낙타를 탔더니 양 허벅지의 근육이 불이 난 듯 아파왔다. 혹시라도 낙타가 갑자기 염소처럼 물구나무서기라도 할까 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떨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다리에 힘을 주고 있던 것을 슈밤이 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낙타에서 내려와 슈밤과 낙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서 시간을 볼 수 없게 되자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지금 여긴 어디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이 사막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했다. 시간과 공간의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한 채 걷다 보니 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이 황량한 사막엔 나의 의식을 분산시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나의 의식은 걷는데 집중이 되었다. 왼발을 내디딜 때 앞꿈치가 먼저 땅에 닿는지 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는지 면밀하게 관찰했다.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는 나의 걸음걸이인데 빠르게도 걸어보고 살짝 다리를 구부려서도 걸어보며 그 차이를 몸 소 느껴보았다. 한 참 걸으면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느끼는데 집중하다 보니 슈밤이 내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시선을 들어 슈밤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엔 작은 샘과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사막의 오아시스구나!
황량한 사막 속에 우뚝 솟아있는 나무를 보자 큰 감동이 밀려왔다. 생명을 보기 힘든 사막에서 생명의 근원이라 불리는 나무를 보게 되다니! 저깟 나무가 뭐라고 나는 계속 우와! 하며 탄성을 자아내며 나무를 감상했다.
슈밤은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 가자며 짐 속에서 돗자리를 꺼내 펼쳐주었다. 낙타들도 샘에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슈밤은 차를 끓일 땔감을 구한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슈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건너편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상을 세심히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자세히 나무를 관찰하였다. 나무의 뿌리, 기둥, 나뭇가지, 나뭇잎 하나하나 분리해서 관찰해 보고, 또 전체적으로 멀리서도 관찰해 보았다. 나무를 관찰하다 보니 나무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싶을 정도로 나무의 세세한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나무를 관찰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슈밤이 땔감을 가지고 나타났다. 나의 시선은 이제 나무에서 땔감으로 옮겨졌다. 난 혹시 슈밤이 가져온 땔감을 구석기시대 사람처럼 돌로 마찰을 일으켜 불을 지피지 않을까 싶어 슈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슈밤은 나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로 불을 지폈다.
슈밤은 작은 냄비에 물을 붓고 각종 향신료를 넣어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땔감이 탈 때 내는 타닥타닥 장작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무는 아낌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구나. 포근한 엄마의 품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향신료가 우러나자 슈밤은 찻잎을 넣고 뒤이어 우유와 설탕을 마저 넣어 마살라 짜이를 끓여내었다.
카다몬과 생강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찻잎만 넣었을 땐 어두운 검은색을 띠던 차에 우유를 넣는 순간 황금빛 갈색으로 변하니 짜이를 끓이던 슈밤이 연금술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슈밤은 작은 토기잔에 짜이를 채워 나에게 건네주었다.
"와아!"
처음엔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저 뜨거운 차를 무슨 수로 마시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건가? 향신료의 알싸한 맛과 달달하면서도 부드러운 이 맛이 천국에 와있는 듯했다.
슈밤도 자리를 잡고 앉더니 짜이를 마시며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도 시선을 다시 나무 쪽으로 옮겨갔다. 우리는 말없이 짜이를 마시며 나무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무 외엔 아무것도 바라볼 게 없었다.)
태어나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나무를 바라보고 관찰해 본 건 처음이었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황량한 사막이라는 이 공간에서 지금 이 순간 차를 마시며 나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사막 사파리 투어를 막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온갖 잡다한 생각과 걱정거리들이 어느 순간 잠잠해 있었다.
슈밤은 해가 지기 전 오늘 야영할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낙타에 실어온 짐들 속에서 페르시안 양식의 카펫을 꺼내더니 평평한 모래 위에 깔아주었다. 그리고는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삶은 계란과 오렌지 그리고 토스트와 쨈이었다.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무는데 입에서 모래가 서걱서걱 씹혔다. 사막의 무더위에 심한 갈증을 느껴서 토스트는 포기하고 대신 오렌지를 먹기 시작했다.
한 알을 똑 떼어서 입에 넣자 오렌지의 싱그러움과 달콤함이 동시에 입안에 퍼져나갔다. 오렌지의 향긋한 향기와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꽉 찬 과즙에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나는 몇 개 안 되는 오렌지의 맛을 최대한 음미하고자 천천히 꼭꼭 씹어 삼켰다.
저녁을 차려주고 난 뒤 슈밤은 어딘가 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 계속해서 사라지는 슈밤이 대체 어딜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슈밤을 뒤쫓아보기로 했다. 우리에겐 맛없는 토스트를 주고 혼자 어디 가서 몰래 맛있는 거라도 먹나 싶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슈밤은 우리 뒤편 언덕을 올라갔다. 슈밤은 석양을 보기 위해 사라졌던 것이다.
도시엔 번잡한 광고판, 대형 스크린, 백화점과 음식점 등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것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의식을 빼앗고 우리를 조종한다.
도시를 떠나 숲에 가면 나무도 있고 새도 있고 꽃도 있고 폭포도 있다.
산을 떠나 바다에 가면 물고기도 있고 돌고래도 있고 산호초도 있다.
하지만 사막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슈밤을 보며 그가 보낸 오늘 하루를 속으로 되짚어보았다.
사막을 말없이 걷기(걷기 명상),
짜이를 끓여 마시기 (차 명상),
몇 시간 동안 나무 관찰하기 (집중 명상),
천천히 식사하기 (먹기 명상),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기 (정화 명상),
그의 하루 일과는 명상으로 시작하여 명상으로 끝이 났다.
명상이란,
걸을 때는 내가 걷는 것을 알아차린다.
차를 마실 때는 차의 색, 향, 맛을 알아차린다.
나무를 관찰할 때는 나무의 모양, 색, 향을 알아차린다.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의 색, 모양, 향, 맛을 알아차린다.
해가 질 때는 해가 지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늘 위에 별을 볼 때는 별들의 위치, 간격, 밝기, 모양 등을 알아차린다.
해가 뜰 때는 해가 뜨는 것을 알아차린다.
우리 모두는 명상하듯 여행을 한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여행을 산다.
나의 가이드였던 슈밤은 매일 이 황량한 사막을 여행하며 매 순간 명상을 하고 있었다. 명상이 그에게는 여행의 일부이자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 작가의 다른 글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ce9f6fd49e9c44d/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