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모으다
나는 무슨 연유로 이 문장을 세 번 넘게 읽고 마음 뭉클해했을까? 배우이자 작가 봉태규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맡겨져 부모를 늘 그리워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빚을 갚았고, 아버지와의 유대관계도 좋지 못해 꽤나 오래 그를 미워하고 용서했다. 작가의 유년시절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외로움’이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꽤나 자주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아내를 만난지 두 번만에 프로포즈를 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둘 시하와 본비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크기의 커다란 위로를 받는다.
작가는 둘째 딸 본비에게 오늘의 문장과 같이 이야기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을지 저릿하게 느껴졌다.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딸에겐 오로지 딸의 행복만을 위한 선택을 하라고 말해주는 그 마음. 길고 긴 외로움과 어려움을 이겨낸 그가 보였고 딸에 대한 사랑이 마음 가득 느껴졌다. 어쩌면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더불어 동시에 내가 가장 원했던 말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이 한 문장에 멈춰 오묘한 감정을 오래도록 느꼈다. 내게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라,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며 선을 그어주는 단호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랑과 행복에 대한 가치관
우리는 행복, 사랑, 고통, 즐거움 등의 가치들에 대해서 그 어떤 확실한 원리도 갖고 있지 않다. 그 누구도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단어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각자의 경험과 느낌대로 정의를 내리는 과정이 흥미롭고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있어 그 어떤 가치들보다 가장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은 사랑과 행복이라, 여전히 타인의 경험과 의미를 알아가고 배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동안 사랑은 내게 희생과 헌신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더불어 행복은 겨울에 내리는 진눈깨비처럼 사르르 내렸다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것과 같았다.
사랑과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정의하기 시작한 건 나라는 자아를 세상에 다시 꺼내기 시작한 20대 후반즈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독하게 사랑한 건 가족이었고 가족에 대한 내 마음과 태도는 늘 희생과 헌신이었기 때문에 굳어져버린 사랑의 형태를 바꾸고 싶었다. 지독하게 노력해야 찾아오는 행복이라는 존재에 대한 허탈감,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삶을 버티려 진눈깨비눈처럼 녹여버린 나 자신. 두 가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민하다 보니 행복과 사랑은 참 가까이 맞닿아있어, 하나를 정의하면 다른 하나의 형태도 천천히 모습을 갖춰가 마음이 뭉클했다.
행복을 찾는 여정
나는 상대에게 행복과 사랑에 대한 정의를 물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행복이란 뭐라고 생각해?”, “사랑이란 뭐라고 생각해?”
그 대답들이 매우 흥미롭고 각양각색이라, 휘발되지 않고 주변에 모여 기분 좋은 감정을 만들어준다. 동시에 아직 정의 내리지 못한 내가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내가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이유는 그 사람의 프레임을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의 프레임은 사람의 행복과 의미추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차곡차곡 모으는 사람인지 혹은 진눈깨비처럼 녹아 사라지게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헤르만헤세는 말했다. “행복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다.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재능’이라는 말에 나는 너무나 공감한다. 사람은 프레임을 선택할 수 있기에,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열쇠를 인지하고 가질수도, 외면하고 휩쓸려갈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 행복을 느끼는 재능은 ‘노력’해서 가져야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행복의 상태
한 번은 상대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냥 안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상태 아닐까?”
어쩌면 너무나 현실적인 그 대답에 곰곰이 생각해 보다 얼마 전 읽은 책 <마음의 지혜>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책에 의하면, 행복은 ‘나쁜 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 ‘좋은 게 있는 상태’라고 한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두툼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꿀벌이 살기 위해 꿀을 모으듯 인간도 시련을 버티기 위해 행복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분 좋은 감정들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것이 모여 커다란 행복의 뭉치가 되고, 내가 힘들 때, 지칠 때, 버티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되는 것이다.
결론은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나,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것 또한 나 자신이라는 것. 이것이 아주 중요한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걸 배웠다. 삶을 살면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편안해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즐거운 것들을 찾아가는 것. 그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행복을 모아가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느끼는 행복이 명확해지면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의 감탄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서는 마지막에, 순간적으로 휘발되는 타인의 감탄 때문에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 돈뿐 아니라 목까지 매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한탄하기도 한다. 그만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해 스스로를 소모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어쩌면 행복을 정의하는 일은 나의 중심을 세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까.
행복을 모으는 방법
내가 어떤 순간에서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는지를 기록해보려 한다. 일정한 패턴을 찾기 위한 과정이랄까. 뭘 먹으면 기분이 좋은지, 속상할 때 어떤 방법이 나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등등. 생각보다 사람은 감정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쉽지 않고, 동시에 좋은 기억들을 쉽게 잊곤 하기 때문에 기록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소소하고 소박하더라도 내가 힘날 수 있었던 것, 나를 웃게 해 줬던 것, 힘빠져 있었지만 움직이게 해 준 것 등에 대해서 그 상황과 감정을 기록해 보는 것이다.
나는 내가 늘 예민하다 생각했지만, 사람 자체가 원래부터 환경과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라고 한다. 아주 습할 때 공기가 짓누르는 느낌, 불편하거나 혹은 계속 만지고 싶은 질감, 천장의 높이, 빛, 가벼움과 무거움 등 모두 다 뇌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어떻게든 또 다른 것에 영향을 미쳐 나의 생각과 기분을 바꾸게 해준다. 정말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준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내 가속 상하거나 답답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실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프레임이 아니라 환경 프레임을 가져보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그 변화들을 발견하고 기록하고 활용하는 것이 모이면 스키마가 되어 어느새 행복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에게 행복이란?
나에게 행복은 공부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 사소한 것부터 온전히 느껴야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뭔가 거창하고 커다란 것, 완벽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지나가는 순간들의 포착.
잠깐 정리해 보자면, 나는 좋은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고 산책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될 때 오래전부터 착용해 온 아쿠아마린 팔찌를 만지작 거리면 차분해진다. 책의 좋은 구절들을 나눌 때 보람을 느낀다. 때때로 컨디션에 따라 다르게 땡기는 디저트를 한 입 먹을 때 살아난다.
몸이 찌뿌둥할 때 30분 정도 요가를 하면 풀리는 개운함을 좋아한다. 책을 읽다가 유레카 하는 문장을 발견하면 마음이 설렌다. 글로 생각을 모두 표출할 때 속이 시원하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기분 좋아지면 기쁘다.
이 외에도 내게는 경험으로 모인 나만의 행복 뭉치가 있다. 더 큰 뭉치로 만드는 것은 내게 달렸다. 앞으로 연습하다 보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행복이라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