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숭명이 정성민 교사에게서 결정론을 배움
이 글은 앞서 게재한 "결정론[숙명론]자 강숭명(3)"의 글의 실마리가 되는 글입니다.
❶숙명론의 전도사 정성민
①결정론 수업
예지 고등학교 2학년생인 강숭명(康崇明)은 두뇌가 명석하고 어떤 문제든 집착하기 시작하면 궁극적인 해결을 볼 때까지 굳세게 밀어붙이는 성격의 학생으로 전교에서도 알아주는 매우 영민한 우등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 거금을 주고 홀 아들이 무병장수하고 대성하라는 길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숭명(崇明)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결정론]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따려고 성심으로 연구하는 결정론 신봉의 그 학교 교사 정성민은 숭명에게 자기의 견해를 열심히 가르친다.
정성민 교사는 숭명에게 몇 번이나 되풀이 강조해서 말했다.
“숭명아!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건 결정론이야. 모든 사태는 결정론의 법칙에 따라 그것의 뒤를 잇는 앞선 상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 사물을 일으키는 모든 사태가 시간 계열상에서 영향을 받는 순서에 따라 먼저 일어나는 일을 원인, 원인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맺어지는 결과의 법칙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그 법칙이 바로 결정론이다.
인과관계란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무시무시한 과학적 법칙으로 그 핵심이 바로 결정론이거든. 결정론은 그리스 시대부터의 숙명론, 운명론, 등의 운명관 등을 비롯해 심리철학의 수반론(隨伴論),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 가운데 물리적 육체적 측면 등 유물론에 입각한, 또는 유물론에 긍정적인 측면을 골라 가르쳤다.
이처럼 결정론은 유전자의 아주 강력할 유전법칙일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행이나 기후 변화 등 모든 물리화학적 법칙까지 과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 기독교나 불교 등의 종교에서까지도 모두 신봉하는 법칙이어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아니 부인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믿어 마지않는 진리이거든!.”
이렇게 설득하면서 기독교의 결정론은 바로 여호와 신의 뜻에 따라 세계가 통제된다는 유신론적 결정론이라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연기론(緣起論)]이라고 해서 일체의 만상이 업(業) 및 과(果)에 따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한 사물이 일체 만물과 인연이 되어 서로 의지하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관계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결정론을 지지하지.”
그러면서 “"어느 한 시점에서 우주의 상태가 주어지면, 완전한 법칙들의 집합에 의해서 우주의 미래와 과거가 철저히 결정된다[스티븐 호킹]. 이러한 행성의 궤도 운항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도 물리법칙에 따라 지배되고 결정된다.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는 전혀 없다.”고 철저히 부정하고 강한 결정론만이 옳은 이론이라는 점을 납득시킨다.
※센 고비: 천재지변 · 기상(氣象)
♥[칸트] 원인┈결과의 관계는 경험으로부터 도출해 낼 수 없는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경험(단, 이 경우 '경험'은 이미 경험적, 과학적 인식이고, 따라서 또한 객관적 인과적 인식이지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사유(=주관)의 선천적 형식이라고 했다.
따라서 결정론적 법칙은 어떤 특정한 사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태에 적용되고 따라서 원인에 해당하는 앞선 사태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에 모든 원인은 다시금 그것의 원인을 가져야 하고 이러한 인과 계열은 무한히 소급된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②숭명의 견해
숭명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배워 오히려 스승인 정성민 교사보다 더 열렬한 결정론자, 아니 결정론을 뛰어넘는 숙명론자가 된다.
숙명론적 인과관계⎯원인이 결과로 이어지면서 영향을 미쳐가는 자연계 변화를 이끄는 과정의 필연적 법칙.
♣도덕적 책임 문제 [강숭명] 도덕적 책임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숙명론을 왜곡시키는 것은 앞뒤가 바꾼 것이다.
결정론
♣ 약한 결정론 문제, 강한 결정론과 약한 결정론을 통합하는 숙명론
숙명론은 어떤 조건의 변화와도 무관하게 특정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주장 ⎯곧 인과법칙에 관한⎯ 인 반면, 결정론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필요조건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험의학과 베르나르의 생명관 (의학사상사, 2007. 1. 25. 여인석)
양립 가능론
결정론이 참이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는 입장. 곧 우리가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들', 여전히 우리의 행위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입장에 해당한다. 양립가능론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는 '우리의 행위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가?'와 독립적인 문제이며, 결정론이 자유의지의 부재를 함축한다고 보는 것은 '자유의지' 개념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라는 것이다. 다만 오해라고는 하지만 자유의지 개념은 윤리학적 차원에서 실제로 그렇게 설계되고 그렇게 이해되어 왔으며, 고로 실상 해당 개념 자체를 현대화시켜서 소모적 논쟁에서 비껴가게 하는 것에 가깝다. 대니얼 데닛이 주로 이런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무위키
[양립 가능론자 반박]
숭명은 그의 숙명론이 결정론과는 다른 것으로서 잘못된 결론이라고 지적하는 스승 정성민에 대해 반박하면서 “어떤 양립 가능론자들은 운명이 결정되었다면, 부도덕한 자들에 대한 징벌이 무의미해지므로 자유 의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처럼 비과학적인 주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도덕을 살리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자유 의지를 끌어드리는 인위적인 조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자유 의지도 없고 도덕 따위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이런 말도 했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아요 …………내 과학적 성과는 틀림없이 정해져 있었어요.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요인에 의해서요.” 출처 : 대학지성 In&Out(http://www.unipress.co.kr)
숭명은 “행위, 신념, 욕구는 유전자로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숙명론이 아닌 결정론은 자연의 물리화학적 법칙을 망각하고 필요 조건이라는 이론을 내세우는데, 그러나 그 필요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필요로 하는 것도 파들어가 보면, 인과관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결정론의 결론은 숙명론과 마찬가지이며 결국은 숙명론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조건이 요구되는 결정론이나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결정되는 방법과 결과가 다르다는 약한 결정론 따위는 없다. 고 주장한다.
”예컨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입자나 파동의 움직임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확률에 따라 파악할 수 있을 뿐이어서 정확한 동시 측정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코펜하겐 해석을 기점으로 '결정론'이라는 개념이 달라졌다는 입장에서 결정론에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견해다. 입자나 파동의 움직임은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다만 인간적인 판정 능력과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그것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지 입자나 파동의 위치가 결정론적 인과법칙에서 벗어난, 따라서 그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거나 인과율이 없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인식의 문제와 위치 파악의 문제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 것일 뿐이다.
코펜하겐 해석 대신 옹호하는 개념으로는 "확률론적 결정론"이 있다.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일종의 다른 차원으로 취급하여, 설령 미시 세계가 확률적이더라도 거시 세계에서의 결정론을 무용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당 입장에 따르면 전통적인 '결정론' 개념은 '확률론적 결정론'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비결정론의 본질과 배치되지 않는다.
이러한 대답이 옹호되는 첫 번째 동기는 거시 세계에서는 여전히 뉴턴 역학이 잘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결정론은 불확정성 원리와 코펜하겐 해석에서 기인한다. 불확정성 원리는 간단히 말해 입자와 운동량의 정확한 동시 측정이 불가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고, 코펜하겐 해석은 입자의 상태를 관측 이전엔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고 관측 이후에는 특정한 상태로 고정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하는 결정론에 따르면 조건이 같은 개개의 단일 사건을 관측할 때마다 독립적으로 고정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지만,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 세계에서는 여러 번의 관측 시행을 통해 통계적으로만 결과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론은 부정된다.
비결정론은 이런 '결정론'의 결함을 지적할 뿐, '만사에 정해진 것이 없다'는 비약과는 무관하다. 만사가 결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알 수 없도록 정해져 있는지 역시 알 수 없으므로 위와 같은 비약은 이런 식의 공상과 동일선상에서 경쟁하게 된다.
비결정론은 뉴턴 역학 식의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뿐 만사가 정해져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지 않으며 오히려 법칙의 결정성은 긍정한다.
➂숭명의 결론
이처럼 결정론은 숙명론의 아류이며 약한 결정론은 사이비다. 약한 결정론자들은 태초로부터 연면히 이어지는 물리적 연관 관계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일부만 잘라서 사용하는 [단속(斷續) 결정론]에 불과하며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물리적 결정론에 따르는 일관된 결정론은 숙명론밖에 없습니다.” 하고 반박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운명을 예측하고 더구나 이를 인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주팔자ㆍ주역ㆍ점성술ㆍ성명학ㆍ관상과 손금 등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든 시도는 실현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운명 예측이 원리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현대 인간의 지능과 지식수준으로 이를 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이미 정해진 운명을 어떤 수단 ⎯굿을 한다거나 부적을 사용한다거나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으려 한다거나 기도하는⎯ 방법으로 적절히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며 사기일 수 있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결정론과 절대로 양립할 수 없으며 이 세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됐고, 인간에게 자유 선택의 여지는 없다.
❷강숙명의 상태
①부정적 상태
숙명론에 심취한 뒤로 숭명은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조심성이 없어졌다.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까닭이다. 그래서 주의가 산만해 지고 집중하지 않는다. 감정이 메말라가고 사랑도 식었다.
그는 이전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하나뿐인 아들 숭명이를 끔찍이 사랑했고 숭명이 역시 자기를 위해 고생하시는 홀어머니에게 지극한 사랑을 지니고 자기가 대학을 졸업해서 좋은 데 취직하여 어머니를 편히 모시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어머니의 사랑이 알고 보면 유전자 근인도에 따른 번식욕과 옥시토신의 작용 결과일 뿐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자 어머니의 사랑에 심드렁해졌기 때문이다.
총명한 머리를 지닌 숭명이는 이래저래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역시 공부 잘하고 예쁘고 착한 나영이와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숙명론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숭명이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져 가더니 요사이에는 나영이에 대한 사랑도 거의 사라져 갔다. 아버지가 자기를 극진히 사랑한 것이나 어머니의 사랑, 나영이의 사랑도 사실은 태초로부터 전해지는 물질파의 불변하는 영향력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느꼈다.
나영이에 대한 자기의 사랑도 자기의 테스토스테론의 작용일 뿐이고 자기에 대한 나영이의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경전달 물질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에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느꼈다.
그 호르몬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단백질의 물리화학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춘향과 이 몽룡이 서로 좋아하는 것도 그런 물질들에 관한 뇌의 뉴런 작용, 곧 뇌파의 결과일 뿐 아닌가?
[정성민과의 언쟁]
정성민 교사는 숭명이의 이런 생각이 아직도 관념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라면서 나무랬다. 또 자기의 노력으로 숭명 학생의 정신이 발전했으므로 그 공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나 강숭명은 정 선생님이 자기를 가르친 모든 과정과 결과가 태초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반박하며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박사학위를 따시려고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셔도 운명이 박사학위를 따도록 결정되었다면 따시게 될 것이고, 결정되지 않았다면 못 따실 것입니다.”라고 힐난했다.
정성민 선생은 어이가 없어서 ”나는 옳은 걸 옳다고 한 죄 밖에 없다. 왜 너는 옳은 말을 하는데도 힐난하냐?”고 짜증을 냈다.
➁가치관도 없어졌다.
[목적이니 가치니 의미도 필요 없다]. 그저 뇌의 작동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에게 무슨 목적이 있을 수 있을까? 그냥 프로그램된 내용에 따라서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 내 스스로의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를 따져 무엇이 아름답다거나 진리라거나 착한 행위라고 할 수도 없다. 아름답다고, 진리라고, 착한 행위라고 느끼는 것도 모두 뇌파의 작동에 의한 것일 뿐 자기가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것도 자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해야만 일어나는데 자기의 행동이나 웃고 울고 슬프고 기쁜 감정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마당에 자기에게 그럴 이유는 없다고 느낀 것이다. 누구에게 고마울 것도, 사랑스러울 것도 없고 서운하거나 유감스럽거나 미워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상태
그는 또 학업이나 성공의 목표 따위도 자기의 숙명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망상을 꿈꾸는 어리석은 속인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생각되었다.
숭명은 아버지가 기대하는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나 성공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려 숨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하던 마음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숙명이므로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등 결정론의 신념이 확고해진 뒤로 의욕을 잃었다.
공부도 아예 열심히 하지 않았고 얼마 안 가 성적이 하위권을 맴도는 형편이었는데. 그래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처리한다고 생각하던 때에는 책임감과 경쟁의식으로 인해 힘이 들어 심신이 피곤하고 지쳐 있었는데 만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홀가분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어졌다.
[책임감] · [희망] · [의무 의식] 등도 없어졌는데 그러자 힘들게 노력하고 앞날을 걱정하면서 마음 졸이고 책임이나 의무를 느끼거나 힘들일 필요도 없어졌고 남을 미워하거나 예뻐할 일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민족의 시조라는 황제(黃帝)가 꿈꾸고 일어나 세상만사에 달관했다더니 자신도 그처럼 너그럽고 대범해졌다. 그래서 사고를 친 아이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고 이로 인해 숭명은 교내외의 칭송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어리둥절하다. 숭명은 그래서 숙명론을 알게 된 것이 고맙기조차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