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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Feb 26. 2021

다르덴 세계의 확장, 제니와 아메드

<언노운 걸>, <소년 아메드>로 본 다르덴 형제의 변화

다르덴 형제의 변화


<언노운 걸(La fille inconnue)>(2016)은 다르덴 형제의 최고작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확신에 찬 영화 중 하나다. 다르덴 형제는 초창기와 달리 소재를 향한 접근법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들의 초기작에선 특징적인 촬영 및 스타일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들은 대상에 관한 판단이나 평가를 유보하고 열린 담론의 여지를 남겨두기도 했다. 하지만 촬영에 있어 <로나의 침묵(Le Silence De Lorna)>(2008)은 클로즈업을 강박적으로 사용하는 대신(전작인 <더 차일드(L' enfant)>(2005)와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인물과 그 주변부를 함께 담아낸 작품이었고, 작법의 측면에서 <자전거 탄 소년(Le Gamin au vélo)>(2011)은 그간 반복해온 관조 및 관찰 대신 적극적인 개입을 선보이는 작품이었다. 이후 다르덴 형제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2014)에서 연대 가능성을 탐구하고, <언노운 걸>에서 또렷하게 주장한다. 이런 변화는 너무 노골적이라 희망을 향한 순진한 믿음처럼 보여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언노운 걸>은 적극적으로 타자를 포용하려는 연대 의식과 공동체적 책임을 환기하는 영화다.


<소년 아메드(Le jeune Ahmed)>(2019)에서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 이어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변화를 모색한다. 어떤 가능성과 변화인가. 그들은 작은 관심에서 출발했던 사소한 개인 서사가 이데올로기가 동원된 거대 담론으로 과감히 전환될 수 있는지 자문한다. 벨기에 동부 공업 도시 리에주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그들은 산업화된 도시 및 사회 구조의 부조리에 희생 당하는 약자들의 삶을 조명해왔다. 기존의 다르덴 형제는 소외자들의 각각의 사연을 기교 없이 담아냈다. 그런데 <소년 아메드>는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느껴지는데, 개인이 아닌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소년 아메드>는 종교와 결합한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건드려서 인류 공동의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작품이다.



타자를 매개로 인류를 향한 공동체적 논의를 환기하는 <언노운 걸>


<언노운 걸>은 들여다볼수록 특이한 작품이다. <언노운 걸>의 제니는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졌다. 마을에 사는 노인, 아이들, 환자들은 제니를 단순 직업적 차원의 의사가 아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말동무이자 이웃, 보호자 등)로 여긴다. 사회적 계급이라는 거친 잣대를 들이댄다면, 제니는 다르덴 형제가 주로 다뤄온 인물과는 다른 속성의 인물이다. 사회의 단면 속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약자들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는 늘 인간관계의 회복과 윤리적 측면에서의 고찰이 동반되곤 했다.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제니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해 그간 자신들이 다뤄온 담론을 어딘가 다른 형태로 확장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제니는 다르덴의 인물 가운데 가장 겉도는 타자이다. 이런 그녀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더 차일드>의 브루노 같은 존재)을 교화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이는 다르덴 형제의 인간─'개인'보다는 확장된 관점에서의 '인류'─을 향한 믿음이 투영된 결과다. <언노운 걸>은 종착지를 바라보며 분명하게 외치고 있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진정한 연대는 진실을 숭고히 하려는 시도, 소외된 이웃을 향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이 중요한 역할을 <언노운 걸>에서 제니가 떠맡게 되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촬영 방식이나, 서사 구성의 특성상 제니가 어떤 사람인지 깊게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서사의 설득력은 다소 떨어지며, 이야기의 동력은 미미하다. 또한, 다르덴의 영화답지 않게 <언노운 걸>은 너무 작위적인(혹은 비현실적인) 인상을 풍긴다.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는 실험적 태도를 고집한다.


제니는 죄책감에 잠도 못 자고 비정상적인 생활 패턴에 갇힌다. 이 죄책감은 어디서 왔는가? 며칠 전 죽은 소녀 때문이다. 제니가 소녀를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제니는 자신 때문에 소녀가 죽었다고 여긴다. 영화를 지탱하는 요소가 제니와 죽은 소녀라는 점이 중요하다. 죽은 소녀는 마을의 변방에서 위험에 노출된,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았던 철저한 타자였다. 이 영화에서 추구하는 공동체적 성찰은 제니라는 타자가 죽은 소녀라는 또 다른 타자를 향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다르덴 형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러한 작업을 꿋꿋이 이어간다. 물론 설득력이나 전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전거 탄 소년>을 떠올려 보자. 사만다의 사랑은 그 자체로 판타지적인 은유와도 같았다. 그런 사만다가 마침내 소년을 교화하는 데 성공한다는 다르덴 형제의 희망은 물론 <언노운 걸> 만큼이나 순진해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이 <자전거 탄 소년>에선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소년의 성장과 긴밀하게 녹아들었기 때문에, 적어도 <언노운 걸>보다는 설득력이 있었다. <언노운 걸>은 과감한 전환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와 주변 지인들을 통해서 연대 가능성을 논하는 방식보다도 훨씬 실험적이다.


<언노운 걸>



이데올로기 갈등을 매개로 인류의 화합 가능성을 논하는 <소년 아메드>


<소년 아메드>도 여러모로 흥미롭다.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부정적인 의미로 의심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 이어서 다시 한번 실험적인 작법을 선보인다. 인물 및 배경 설정부터 전작들과 차별화된다. 아메드는 무슬림이지만 그는 비무슬림과 무슬림이 모두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또한, 아메드는 주변의 관심이 필요한 미성숙한 소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 및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메드의 가족은 무슬림 이민자 가족이며, 영화 초반의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는 그러한 배경을 아주 간명하게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제니와 죽은 소녀라는 철저한 타자를 그들의 영화 세계에 개입시켜 관계의 층위를 확장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간 다루지 않았던 종교에서 비롯된 갈등을 도입한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존재를 향한 구원 여부는 보통 개인의 죄의식,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와 맞닿아 있었다. <로나의 침묵>의 로나는 비윤리적 행위를 뉘우치려는 인물이었고, <로제타(Rosetta)>(1999)의 로제타 역시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외자였다. <소년 아메드>에서 우리는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아메드는 교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선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과 겹쳐 보이기도 하며, 유럽의 주류 문화에서 다소 배제된 무슬림이라는 점에선 <언노운 걸>의 타자인 제니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 뉘우쳐야 할 악행을 저지른다는 점에선 <로제타> 등 전작의 여러 인물들과 겹친다. 다르덴 형제는 이런 아메드를 통해 종교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견고한 장벽을 허무는 화합의 시도가 가능한지 묻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더 이상 벨기에의 소도시 속 개인 서사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다르덴 형제는 교정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다양한 인물들과 만나는 아메드가 변화하는 듯한 찰나를 잡아내면서 개선 가능성을 논하려 하는데,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시선도 숨기지 않는다. 사실상 아메드는 교화되기는커녕 극단적인 배타성에 사로잡혀 거짓으로 교화되는 척 연기만 하는 듯 보인다. 이런 다르덴의 회의감이 엔딩에 이르러 더욱 극대화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메드의 극단성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서야 잠시나마 옅어진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논의하던 화합과 개선의 가능성이 불투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언노운 걸>의 실험은 설득력은 떨어져도 다르덴의 희망적 논조는 확고했다. 매력적인 영화(서사나 캐릭터 묘사 등)는 아닐지 몰라도 전하는 바는 확실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소년 아메드>는 논조 자체가 달라졌으며 그들의 연출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인류 전반의 문제로 관심사를 확장해온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회의감을 드러내고 냉소를 날린다. 이런 시선은 분명히 <더 차일드>, <로제타> 등에서 인물이 처한 환경을 향해 판단을 유보했던 것과는 다르다. <소년 아메드>의 냉소는 희망을 기대하던 자가 한계에 봉착하여 느끼는 좌절감과도 같다.


<소년 아메드>



다르덴 세계의 확장


<언노운 걸>과 <소년 아메드>만으로 다르덴 형제의 변화를 심도 있게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영화의 작법은 전작들과 비교해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들어냈으며, 다르덴 형제 역시 초기작들에 비해 스타일을 변주하거나 소소한 변화를 주는 등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르덴의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언노운 걸>이 타자를 동원한 윤리 실험의 장(場)이라면, <소년 아메드>는 스크린 너머의 종교 및 집단적 측면의 거대 담론을 환기하는 무대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는 더 이상 관조와 판단 유보가 아닌, 개입과 참여 촉구에 무게를 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년 아메드>는 그간 반복해왔던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활발한 논쟁을 요구하려는 영화다. 정확히 말하면, 다르덴의 이러한 변화는 인류 공동적 논의의 필요성을 환기하여 관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싶어 하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다르덴의 영화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우려가 생긴다. 원래 다르덴 형제는 철저하게 소외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렇게 포커싱한 개인의 서사가 벨기에 소도시 속 사회적 약자만의 현실이 아닌, 관객 각자의 삶의 영역과 맞닿을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즉, 다르덴의 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로제타>로 인해 제정된 벨기에의 '로제타 플랜'이 이를 방증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작 의도에서부터 정치적 함의가 전제된다면, 개인이 아닌 집단을 위한 논의를 겨냥한다면 다르덴 형제만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 역시 차기작이 심히 궁금해지는 감독이다. 다르덴 세계는 어디까지, 어떻게 확장될 것인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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