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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01. 2024

내 슬픈 만우절의 추억

<중경삼림>과 장국영, 홍콩에 대하여

홍콩 땅을 처음 밟았던 것은 2018년 2월이었다. 내 나이에서 두 세대는 뒤쳐진 <영웅본색> 시리즈를 뒤늦게 보며 컬트적 재미를 느끼고 왕가위의 영화를 통해 씨네필이 되었던 내게 홍콩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도시 그 이상의 의미였다. 가장 체험해보고 싶은 시공간적 배경을 고르라고 했을 때 60년대 LA와 파리, 80년대 도쿄와 더불어 90년대 홍콩을 꼽고는 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시 애인이었으며 다행히 지금도 연인 관계인 윤과 함께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예산을 짰고 내게 씨네필의 꿈을 키워준 홍콩이라는 공간의 모든 것을 담고 오겠다는 포부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어폰을 끼지 않았음에도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겨울이었다.


왕가위의 영화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타락천사>와 <화양연화>이지만 내가 방문하여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홍콩이라는 공간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왕가위의 작품은 <중경삼림>이었다. 침사추이의 청킹맨션 일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련하면서도 씁쓸한 이야기들은 개척지였으면서 동시에 식민지였고, 영국령이면서 동시에 중국이었으며,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결국 그곳만의 특수한 문화를 생성해낸 홍콩이라는 공간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잘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중경삼림>이라는 영화 한 편에서 내가 여행자로 찾아온 도시의 모든 것을 예습한 셈이었다. 이주노동자로 가득 찬 청킹맨션 앞의 거리에서도, 대나무 비계로 고정된 공사판의 정취에서도, 2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 그대로 주어져 있는 영화 속 맥도날드와 샐러드 가게, 재즈클럽과 바, 미드웨이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나는 <중경삼림>의 향수를 느꼈다. 말하자면 홍콩으로의 여행은 4박 5일간의 기나긴 데자뷰였다.


여행 3일 차, 황후상 광장의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길에 만다린 오리엔탈에 들렀다. 홍콩이 낳은 최고의 배우이자 나를 홍콩과 사랑에 빠지게 한 장본인 중 한 명인 장국영이 생을 마감했던 바로 그 호텔이었다. 2월 말이니 아직 기일과는 간격이 꽤 있었음에도 호텔 로비 인근에는 몇 다발의 흰 꽃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호텔 로비를 잠시 서성이다가 역시 몇 송이라도 꽃을 사 왔어야 했나 생각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홍콩에 오게 될 때에는 여행 일정을 그의 기일에 맞춰야 하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몇 송이 꽃과 함께 김경욱의 소설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올려놓고 서울로 돌아가는 거지. 그것 참 거짓말 같은 하루가 되겠어.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여행의 절반이 지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다시피, 장국영은 4월 1일에 삶을 등졌다. 4월 1일. 만우절. 영어로는 April Fool's Day. 홍콩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광둥어로도 표기해보고 싶지만 잘 알지 못하는 언어를 굳이 사전을 찾아가면서까지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1년에 단 하루 거짓말과 짓궂은 장난이 허용되는 날인 19년 전 오늘 그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대배우로서 죽음조차 영화적이었던 셈이다. 작중 애인이 헤어지자고 한 날이 만우절이어서 그 이별 통보가 거짓말일 거라고 한 달 동안 믿었던 <중경삼림>의 하지무(금성무 분)는 애인이 가장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 중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것만을 골라 한 달간 매일 빠짐없이 먹으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얼마 남지 않은 통조림의 유통기한과는 달리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한다며, 있다고 하더라도 만 년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장국영을 그리워하는 우리 마음의 유통기한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해 만우절, 그러니까 2018년 4월 1일. 마치 <중경삼림>처럼 나 역시 윤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당연히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다. 진심임을 알고부터는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떠올렸다. 4월 한 달간 한 캔씩 사 먹고 5월 1일이 되는 날 헤어졌다고 공개해야겠거니 생각했다. 윤에게는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테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지 말고 집으로 와도 된다고 했다. 매일 밤 문을 열면서 신발장에 그의 신발이 놓여있기를 기대할 심산이었다. 윤은 그럼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우리가 키우는 고양이 사진으로 설정해두라고 말했다. 들어갈까 고민이 될 때면 프로필 사진을 보고 내 생각이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겠다고.


5월 1일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으며 조금은 철이 들었던 하지무와 달리 그때의 나는 스물넷에 불과했다.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어른인 척 폼을 잡았지만 여전히 너무도 어렸을 뿐이었다. 다행히 그날의 그 이별 통보는 실제 이별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우리는 수 차례 투닥거렸지만 결국에는 헤어지지 않았다. 거짓말 같기는 했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결말이었다. 나는 내 낭만에 취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철이 없었고 재미를 위해 타인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짓궂었다. 어쩌면 나는 하루하루를 만우절처럼 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하지무처럼 나이를 스물 다섯 즈음 먹어갈 때쯤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누구보다도 거짓말 같았지만 그 때문에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한 번의 진짜 이별을 겪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내게 2019년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징후적인 한 해였다. 나는 상실을 겪고 그것을 메꾸는 과정에서 한층 성장했고 그 결과 어릴 적 보았던 홍콩 영화들에서처럼 조금이나마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기 내게 그런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주었던 홍콩이라는 공간은 정치적 혼란에 잠식당하며 예전의 그 시절과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겪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2018년의 홍콩 여행에서 스쳐 지나가듯 생각했던 것처럼 몇 송이 꽃을 들고 홍콩을 다시 찾는다 해도 그곳은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유통기한이 적힌 파인애플 통조림처럼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은 존재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사랑에조차 유통기한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의 추억만은 영원할 수 있지 않을까. 10여 년 전 홍대 인디 씬을 뒤집어 놓았던 어느 밴드의 노래 가사처럼,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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