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세윤 Apr 02. 2020

9. 행동하는 영웅

코드2. 신화는 영웅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영웅의 탄생을 알리지만 영웅을 진정 영웅으로 만드는 건 행동이다. 브루스는 고담시로 돌아와 배트맨으로 활약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일상에선 억만장자다운 기행을 이어간다. 슈퍼카를 타고, 모델들과 어울리며 문란하고 타락한 행동을 일삼는다. 그렇게 철부지 억만장자 ‘연기’를 하던 브루스는 우연히 어린시절 단짝 레이첼을 만난다.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레이첼에게 브루스는 이게 자신의 본모습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린시절을 상기하며 지긋이 그를 바라보던 레이첼은 답한다.


“브루스… 자기 내면 속엔 예전의 멋진 소년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자길 정의하는 건 현재의 행동이지 내면 속의 모습이 아니야.”

어린시절부터 브루스의 성품을 보고, 그가 부모의 죽음을 겪으며 방황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레이첼이라면 브루스가 철부지 억만장자가 아니란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세계가 한 인간을 정의하는 건 아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그의 행동이다. 그건 단순히 행동이 눈에 보여서가 아니다. 행동은 한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뻗어나와 세상과 교류하고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힘의 응축된 표현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생각이 아니다. 행동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레이철은 브루스가 고담을 바꾸고자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무위’를 탓한 것이다. 


물론 레이첼은 백만장자 브루스의 모습만을 보고 얘기한 것이다. 실제 브루스는 배트맨으로서 누구보다 진중히 악에 대항하고 있다. 훗날 브루스는 그녀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정체를 알려준다. 배트맨으로 분한 그에게 레이첼이 최소한 이름이라도 말해달라고 하자 배트맨은 답한다.


“지금의 날 정의하는 건 현재의 행동이지 가면 속의 모습이 아니야.”



철부지 백만장자와 구원자 배트맨이란 두 겉모습은 사실상 의미없다. 브루스의 정체성은 악에 저항하고 고담시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그의 모든 행동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자신도 혼란스러울 법한 두 겉모습 사이에서 브루스는 행동을 통해 자신을 찾는다.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 이상과 라즈알굴의 절대적 힘 간 균형을 선택한 브루스는 불살(적을 죽이지 않음)의 원칙을 고수하며 배트맨으로서 악에 대항하며 그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최첨단 장비와 도구로 무장해 있지만 그는 아이언맨처럼 살상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배트맨이 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가장 원시적인 전투방법인 격투다. 그가 내뻗는 주먹 한방이 그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그 주먹 한방, 한방으로 그는 원형적 두려움이자 희망의 상징인 박쥐를 만들어 낸다. 그게 크리스토퍼 놀란과 크리스찬 베일이 그려낸 배트맨이다.


히어로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행동의 중요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햄릿’이다. 햄릿은 유령으로부터 숙부 클로디우스가 선왕인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는 복수하고자 마음먹지만 고민만 할 뿐 이를 실행에 옮기진 못한다. 유령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연인 오필리아 앞에서 미친척을 하고, 클로디우스의 악행을 본따 ‘곤자고 살인’이란 연극을 기획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막상 복수할 기회가 주어지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심지어 무릎꿇고 기도하는 클로디우스 뒤에 서서 칼까지 뽑아 놓고선 이대로 그를 죽이면 그가 천국에 갈 수도 있다는 핑계로 상황을 회피한다. 

햄릿의 갈등은 비단 복수에 대한 선택 만은 아니다. 갈등의 핵심에는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의문이 있다. 햄릿은 사후세계와 현실세계, 광기와 이성, 연극과 실제, 아들과 연인 등 수많은 페르소나 사이에서 본인의 존재를 잃어버린다. 정체성을 상실했기에 ‘사느냐, 죽느냐’조차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됐고 행동할 근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갈등은 그가 선택하고 행동하며 해소된다. 죽음을 무릅쓰고 클로디우스가 꾸민 결투에 참여한 햄릿은 결국 클로디우스를 죽이고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자신도 죽음에 이른다. 결투라는 극적인 상황에서 뻗은 그의 칼은 현실을 뚫고 클로디우스의 심장을 찌른다. 갈등의 근원이던 수많은 페르소나를 관통해 자신의 본질을 찾은 것이다. 

햄릿은 죽기 전 후임왕을 선택함으로써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권을 행사한다. 그런 그에게 후임왕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을 인물이다’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독살한 숙부에게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왕위를 내줬던 햄릿은 죽음을 감수하고 결투에 임하며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예언자 오라클의 방문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란 소크라테스의 경구가 새겨져 있다. 오라클은 자신이 인류를 매트릭스에서 구원할 ‘더원’인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네오에게 그가 더원이라면 스스로 알 것이라 말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랑에 빠졌음을 느끼듯 말이다. 네오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더원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네오는 자신이 총알보다 빠른 에이전트를 제압하고 세계를 구원할거라 믿지 않는다. 그가 더원이라고 믿는 건 모피어스 뿐인데 오라클은 그 믿음 때문에 모피어스가 자신을 희생해 네오를 구할 거라고 한다. 혼란스러워하는 네오에게 오라클은 네오와 모피어스 둘 중 한명은 죽을 거고 누가 죽게 될지는 네오의 선택에 달릴거라고 말한다. 

오라클의 예언은 현실이 된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대신해 에이전트에게 잡히고 네오는 에이전트에 대항해 모피어스를 구하러 갈지 선택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 들어야 하는 것이다. 네오는 결국 모피어스를 택한다.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에이전트에 대적하며 모피어스를 구해낸다. 그 선택과 행동은 변화를 초래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격투 속에 네오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간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서 자신이 더원이란 사실을 자각한다. 각성한 네오는 자신과 모피어스의 목숨을 모두 지켜낸다. 그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미래 또한 바꾼 것이다. 


말은 써야 글이 되고, 의지는 행동해야 관철된다. 때로는 생각이나 의지가 내 행동의 지침이 되긴 하지만 행동하지 않고 생각과 의지가 현실이 될 순 없다. 행동이야 말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정체성의 본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8. 슈퍼히어로 비긴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